[九曲기행 .27] 청도 운문구곡(上)...黨禍에 초연했던 신도반처럼…‘은자의 삶’ 선택한 박하담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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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3 08:07  |  수정 2021-07-06 14:42  |  발행일 2018-08-23 제23면
박하담 사화 겪으며 벼슬길 버려
1536년 운문천 일대에 구곡 설정
눌연 위 정자 ‘소요당’ 짓고 은거
조정 수차례 부름도 응하지 않아
[九曲기행 .27] 청도 운문구곡(上)
박하담의 운문구곡 중 1곡인 선암(仙巖) 근처에 있는 선암서원(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은 강당이다. 선암서원은 1577년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으며, 박하담과 김대유를 기리고 있다.

운문구곡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1479~1560)이 청도군 운문면과 금천면에 걸쳐 흐르는 운문천과 동창천에 설정해 경영한 구곡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구곡 중 매우 이른 시기에 설정된 구곡에 속한다.

박하담의 문집인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에 ‘중종 31년(1536) 선생의 나이 58세에 운문구곡가를 지으시다. 무이도가에 차운하니 소요하는 취미를 읊으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박하담은 1536년 주자가 무이산의 무이구곡을 읊은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운문구곡가를 지은 것이다. 그는 운문천 일대에 운문구곡을 설정하고 소요하며 구곡원림을 경영했다.

그는 왜 운문천에 운문구곡을 설정하고 은거하는 삶을 살았을까.

박하담은 명문 집안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고려시대부터 벼슬에 나아가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가학으로 이어갔다. 조부 때 밀양에서 청도로 옮긴 이후 청도의 대표적 사족으로 자리 잡게 된다.

연산군은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세조를 겨냥한 대역무도의 행동으로 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의 제자인 탁영 김일손이 그 글을 실록에 기재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했다. 그리고 정여창·김굉필 등 김종직의 문인 3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당시 20세이던 박하담은 김일손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사화 겪으며 은거를 택한 박하담

‘제나라 역사에 다투어 쓴 것은 사관의 곧음이고(齊簡爭書惟史直)/ 공자는 꺼림을 빌려서 때에 따라 권도를 행하였네(魯田假諱達時權)/ 어지러운 한나라 세상에 초연히 재앙을 면하니(瞻烏漢世超然免)/ 나는 신도반이 족히 현명하다 말하리라(我屠謂蟠亦足賢)’.

그는 사화를 통해 사관의 곧음과 공자의 권도(權道)를 생각했다. 권도는 목적 달성을 위해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도를 뜻한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어서 제나라 역사는 사실이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정도(正道)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권도로 임하여 사람이 희생되는 일을 막았다. 그런데 무오사화에서 사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정도로만 대처하다 보니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일손은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박하담은 신도반이 당화(黨禍)에 초연하여 재앙을 면한 것을 현명하다 했다. 중국 후한 말의 학자이며 은자였던 신도반(申屠蟠)은 당고(黨錮)의 화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 살면서 대장군 하진·동탁 등의 초빙을 물리치고 절조를 지키며 생을 마친 인물이다.

박하담은 이런 마음을 굳히게 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데 뜻을 주지 않고 은거하는 삶을 택했다.

‘하늘을 위로 하고 못을 아래로 하여 여기에서 소요하고, 고금을 포섭하여 여기에서 소요하여 자적(自適)의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집의 이름을 소요(逍遙)라고 하였다. 나의 소요는 구름에 날고 하늘에 노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운 곳에서 자재하는 것이다. 산을 마주하고 물에 임하여 태극의 형상을 징험하고, 꽃과 풀을 품평하여 조물주의 뜻을 생각하고, 올려 보고 굽어 보며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보니, 아침의 햇빛과 저녁의 어둠이 기후를 달리하고, 봄의 화장과 가을의 장식이 형태를 변화시켜 온갖 형상을 제공하면서도 무진장하다.’

‘소요당일고’ 중의 ‘소요당기’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나타나듯이 박하담은 은거하는 자연에서 그 안에 내재하는 이치를 궁구하고 깨닫고 관조하는 소요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 소요의 공간으로 운문을 택했다. 그는 ‘운문부(雲門賦)’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곤륜산의 한 가지 갈라져/ 접역(域)의 산들을 두르네/ 교남(嶠南)에 도주(道州)가 있어/ 방박(旁)을 맺으며 꿈틀하네/ 산들이 고을 동쪽으로 모이니/ 가장 아름다운 곳 운문이네’.

접역은 우리나라의 다른 이름이다. 교남은 문경새재 이남인 영남을 말하고, 도주는 청도의 옛 지명이다. 박하담은 청도의 산천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판단한 운문에 은거하며 소요하고자 했다.

‘군자가 몸을 보존함이 절실하니(諒君子只存身)/ 굽히고 펼 때를 알아서 스스로 노력하네(知屈伸而自强)/ 부귀 보기를 뜬구름 같이 하니(視富貴如浮雲)/ 서쪽 언덕에서 당귀를 캐노라(采當歸於西岡)/ 마땅한 가르침 속에 낙토가 있으니(名敎內有樂地)/ 오로지 소요하며 배회하리라(聊逍遙兮相羊)’.

박하담의 작품 ‘소요부(逍遙賦)’ 내용이다. 그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운문에 구곡을 설정하고, 운문구곡가도 지었다.

운문구곡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선암서원 앞의 선암(仙巖)을 1곡으로 하여, 상류로 오르면서 9곡까지 이어진다. 2곡은 석고봉(石鼓峯), 3곡은 횡파(橫坡), 4곡은 천문동(天門洞), 5곡은 내원암(內院庵), 6곡은 석만(石灣), 7곡은 백탄(白灘), 8곡은 도인봉(道人峯), 9곡은 평천(平川)이다. 운문댐을 거쳐 운문사와 사리암 입구를 지나 멀리 가지산이 보이는 곳까지 걸쳐 있는 구곡이다.

◆박하담은

박하담은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함양군수를 지낸 박융이고, 할아버지는 소고공 박건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승원이고, 어머니는 경절공 하숙부(河叔溥)의 딸 진주하씨다.

박하담은 1516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여러 번 대과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청도의 동창천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은거의 삶을 살았다. 조정에서 박하담의 학행을 듣고 감역, 봉사, 사평 등의 직임을 주며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낙향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함께 청도 지역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했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 칠엽산에 묻혔다.

조식·성수침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시문집인 ‘소요당일고’가 남아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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