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1] 충신 쌍령 윤충우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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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5   |  발행일 2018-08-15 제11면   |  수정 2018-08-15
전쟁터서 보내는 서찰, 愛馬 비룡에 실어 600리 떨어진 식솔에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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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충우가 쌍령전투에서 순절한 뒤 집안에서는 그의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청송군 청송읍 금곡3리 산 10에 자리한 윤충우의 묘 앞에는 그의 애마 비룡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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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충우 묘소 양쪽에 있는 2기의 묘비. 하나(오른쪽)는 글자가 마모될 만큼 오래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근래의 것으로 ‘쌍령순절사파평윤충우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병자호란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삼전도의 치욕이 떠오른다. 또한 천연 요새였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겪었던 참화도 기억한다. 그에 못지않게 치욕적이고 참혹했던 것이 쌍령(雙嶺)전투다. 그 비극의 쌍령전투에서 가족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가 있다. 윤충우(尹忠祐)다. 

윤충우,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26세손
15세에 사서삼경 읽고 글솜씨 뛰어나
“대장부가 어찌 집에서 글귀나 짓겠는가”
말 타기·활쏘기 등 무예 익히는데 열중
병자호란 일어나자 무장 갖춰 전장 나가
병졸 100여명 이끌고 쌍령전투서 전사


#1. 윤충우

윤충우는 파평윤씨 시조인 윤신달(尹辛達)의 26세손이다. 청송군지에 윤충우는 명은(溟隱) 윤황(尹)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윤황은 윤신달의 19세손으로 파평윤씨 명은공파의 파조다. 윤황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해 호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특히 그는 수양대군에 맞서 단종을 보필하다 단종 승하 뒤 영해 칠보산으로 자취를 감추어 파평윤씨 영해 입향조가 되었다. 윤황의 부인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이질녀로 세조가 보위를 찬탈할 때 세조를 따라 가문을 일으키기를 간청하였지만 그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남하해 고결한 대의를 지켰다고 한다. 그 후 윤황의 후손들은 영해에서 청송, 부산 등지로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송읍의 남쪽, 용전천 너머 금곡리(金谷里)는 파평윤씨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지금도 윤씨 가문의 오래된 누정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청송읍에 속해 있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적한 곳으로 ‘금이 나던 곳’이라 하여 금곡이다. 윤충우는 1587년 청송읍 금곡3리에서 태어났다. 출생지가 금연리(金淵里) 국계(菊溪)마을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금곡리의 옛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는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윤귀림(尹貴林)이다.

윤충우는 어렸을 적부터 총명해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글 읽기를 좋아해 15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능히 읽고 글솜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성년이 되어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대장부가 어찌 집안에서 글귀나 짓고 바둑이나 두며 소일하며 살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그때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익히는 데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광해군 13년인 1621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군이 되었다. 좌위(左衛)에 소속되어 부사과(副司果)의 직책을 맡았다가 그 후 종4품 무관인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다. 그러다 인조 12년인 1634년 홀연히 사직하고는 고향인 청송으로 돌아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636년이다. 윤충우는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사내 대장부는 살아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죽어서는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무장을 갖추어 출전했다.

#2. 병자호란 쌍령전투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2차로 조선을 침공했다. 기병을 보유한 적의 빠른 진격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구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인조를 구하기 위해 4만여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북상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이었다. 이들은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군과 마주쳤다. 1637년 정월 초하루였다.

쌍령은 남한산성에서 동남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군은 2만명씩 나누어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치고 목책을 둘러 청병의 공격에 대비했다. 조선군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고 임진왜란 때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으로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고 추정된다.

전투는 왼쪽 저지대의 허완 부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곤지암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청군이 동태를 살피기 위해 기마병 33명을 보냈다가 충돌한 것이다. 당황하고 놀란 조선군은 적이 사거리에 들기도 전에 조총을 쏘아댔고 화약은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우왕좌왕하는 조선 병사들 머리 위로 청나라 기병들이 뛰어올랐다.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는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당시의 참혹함을 묘사하고 있다. 또 ‘병자일기(丙子日記)’에는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병사 허완도 전사하고 말았다.

우측 능선에 주둔한 민영 부대도 대참사를 당한다. 조총 불꽃이 화약통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진영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호기를 맞은 팔기군 300여 명이 급습해왔고, 조선군은 무기마저 버리고 도망치다 줄줄이 압사하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 사방에서 추적해온 청군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는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민영은 휘하의 군사를 독전하며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지만 결국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했다. 쌍령전투는 병자호란 최대 치욕의 전투로 기억된다.

#3. 쌍령에서 순절하다

경기도 광주 설화집에 수록되어 있는 쌍령전투에 대한 이야기 속에 윤충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청송에서 올라온 윤충우 의병장은 쌍령에 도착해 적세가 만만치 않음을 간파하고 노년에 겨우 얻은 다섯 살 먹은 그의 외아들을 생각하고 부인에게 간단한 서찰을 적어 말안장 밑에 끼워 넣었다. 쌍령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윤충우의 애마는 600리를 홀로 달려 청송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님의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말 위에는 빈 안장뿐이었다. 식솔들이 놀라 말안장을 내려 보니 윤충우의 서찰이 나왔다.’

안장 속에서 나온 서찰이 ‘부인 염씨(廉氏)에게 보내는 편지’다. 서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적세가 만분 시급하니 반드시 돌아가기 어렵소. 비록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체인들 전쟁터에서 어찌 찾겠소. 내가 이 편지를 쓰는 날을 내가 죽은 날로 하시오. 만약 모자가 서로 의지하여 이별하지 않으면 다행이며 이 밖에 무엇을 바라겠소.’ 그 후 청송인으로 쌍령 전투에 참가한 부장 신수(申樹)가 전하기를 ‘공(윤충우)은 당일 선봉장으로 병졸 100여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진격한 후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윤충우의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의 묘는 청송군 청송읍 금곡3리 산 10에 자리한다. 그의 묘 앞에는 애마 비룡의 무덤이 나란하다. 상석과 향로석이 갖춰져 있고 양쪽에 묘비가 서 있다. 오른쪽의 것은 너무 오래되어 글자가 모두 마모되어 있다. 왼쪽의 것은 근래의 것으로 ‘쌍령순절사파평윤충우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윤충우의 무덤 오른쪽 옆에는 ‘염씨지위추원단(廉氏之位追遠壇)’이라 새겨진 작고 까만 비석이 있다. 무덤에는 잡풀들이 무성히 자라나 봉분인지 능선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지만 봉분과 석물들은 마치 서로를 바짝 안고 있는 듯 따뜻한 모습이다.

윤충우는 이후 군기시 판관에 증직되었다. 순조 8년인 1808년에는 조정에서 명을 내려 고을의 부사(府使)로 하여금 윤충우를 기리는 사당을 짓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부사는 마을 뒷산 기슭에 사당을 짓고 이름을 ‘상렬사(尙烈祠)’라고 하였다. 상렬사는 100여 년간 춘추로 제사를 지내다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철거됐다. 윤충우의 호는 쌍령, 죽음과 함께 얻은 이름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문화원 홈페이지 자료, 광주설화집 너른고을 옛이야기II,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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