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4] ‘오로지 나라를 위한 한평생’ 충신 노경임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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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09   |  발행일 2018-08-09 제11면   |  수정 2018-09-18
“嶺南 무너지면 나라 무너져”…왜군 침략하자 서둘러 고향 내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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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해평면 창림리에 있는 송산서당. 노경임을 배향한 송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 전체는 복원하지 못하고 송산서당만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 선산에 살던 노수함은 여덟 아들을 두었다. 그중 셋째와 다섯째 아들 노경필·경륜 형제는 충과 효로 명성이 높았다(영남일보 8월2일자 12면 보도). 특히 여섯째 아들 노경임은 가장 두각을 낸 인재로 손꼽힌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해 아버지 노수함은 “이 아이가 장차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지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고 한다. 노경임은 선조 24년(1591) 별시에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 때는 형인 경필, 경륜과 함께 상주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강원도 순무어사 시절에는 공명에 눈이 먼 삼척부사 홍인걸이 우리 백성을 죽이고선 왜적을 섬멸했다고 거짓보고하자, 진상을 밝혀 처벌한 일화는 아직도 귀감이 되고 있다.

#1. 집안의 보배에서 나라의 보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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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65권, 선조 28년 7월26일 정유 5번째기사. 강원도 순무어사 노경임이 공명에 눈이 먼 삼척부사 홍인걸의 거짓보고를 밝혀내 처벌했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섯 살배기 경임의 손을 잡고 노수함이 다정하게 웃었다.

“애비는 확신한다. 우리 경임이가 장차 큰 이름을 떨칠 것임을.”

병중의 노수함은 이제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지금 식솔들에게 한 마디씩 전하고 있는 속내는 유언이 될 것이었다.

안강(경주)을 본관으로 한 선산 사람 노수함은 내내 선산에서 살았다. 벼슬에 욕심이 없어서였다.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의 직을 맡은 적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다 그만두고 선산 독동리로 내려와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에만 전념해오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다. 전의이씨(全義李氏)에게서 노경준(盧景俊), 경인(景仁), 경필(景)을, 인동장씨(仁同張氏)에게서 경건(景健), 경륜(景倫), 경임(景任)을 보았고, 서자로 추측되는 경전(景全)과 경동(景仝)이 더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명민한 아들이 바로 여섯째 아들 노경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린 아들이 새카만 눈동자에서 빛을 발하며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수함은 그 눈빛을 느꺼워하며 중얼거렸다.

“내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수함은 더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노수함이 확신했던 대로 노경임은 영특함이 남달랐다. 집안은 물론 고을에서도 노경임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 기대에 노경임도 부응했다. 걸출한 학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외숙이자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한 열심과 성실함으로 학문과 덕행을 닦은 것이다. 그리고 1591년(선조 24) 10월에 치러진 신묘24년 별시방(辛卯二十四年別試榜)에서 병과(丙科) 12위로 급제했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22세였다. 이후 노경임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정9품)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정9품)가 되어 나라의 일에 집중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2.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일편단심

노경임이 관로에 오른 지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향이 위기다. 영남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 터.”

노경임은 서둘러 선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셋째형 노경필, 다섯째형 노경륜과 더불어 의병을 조직해 공을 세웠다. 바로 왜군의 진로를 막은 상주전투였다. 이후 정5품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한 노경임에게 선조의 어명이 떨어졌다.


선조24년 별시 급제 벼슬길 오른 노경임
노수함의 여섯째 아들로 영특함 소문 자자
“큰 인물 될 것이니 지금 죽어도 여한없다”
병중 부친이 유언처럼 남긴 말로도 방증

첫 관직 예문관검열 반년 만에 임진왜란
두 兄 경필·경륜과 의병 모아 상주전투
공명에 눈먼 관리의 거짓 진상 밝혀 처벌
강원도 순무어사 부임 당시 일화도 귀감



“내 그대를 강원도순무어사(江原道巡撫御使)에 명한다 이르노니 성심으로 과인을 도우라.”

순무어사란 나라에 재앙이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명령에 따라 지역을 다니며 백성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던 이로 순안어사(巡按御史)라고도 했다. 이에 노경임은 강원도로 향했다. 정선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던 즈음이었다. 삼척부사(三陟府使) 홍인걸(洪仁傑)과 동포첨사(同浦僉使) 박감(朴 )의 보고가 전해져왔다.

“왜선 한 척이 삼척부 북쪽의 바닷가에 정박하였기에 군대를 풀어 모두 붙잡았습니다.”

“대처가 훌륭했다. 장하다.”

노경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조정으로 전령을 보내 그대로 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했다. 노경임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도착해 직접 확인해보니 의심스러운 구석 또한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노경임은 치밀한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밝혀냈다.

배가 정박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적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끌려가던 중에 도망친 우리 백성이었다. 그런데 홍인걸이 공명에 눈이 멀어 왜적이라 몰아붙이며 몰살시킨 것이었다. 처형당하기 전 백성들이 울부짖었다는 내용들이 노경임의 속을 할퀴었다.

‘우리는 왜인이 아니오. 조사해보면 알 것이오.’

‘먼 이국땅에 포로로 있다가 죽을 고비를 천만 번이나 넘기면서 왔거늘 결국 이리 죽는구나.’

‘그래도 고국의 산천과 일월을 다시 보았으니, 왜적 손에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노경임은 격노했고 홍인걸의 처벌을 이끌어냈다. 1595년(선조 28) 7월의 일이었다.

노경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무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깨달은 점들을 10가지로 정리해 조정에 건의했다.

“민심이 날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근본이 흔들림을 의미합니다. 전하, 부디 매사와 범사에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소서. 쇠하는 것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 잡는 길이 오직 바른 정사에 있음을 유념하소서.”

나라를 위한 노경임의 충심은 이후로도 빛을 발했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하사도(下四道,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였다. 이원익은 노경임을 종사관으로 불러들였다. 임기응변에도 강하면서 철두철미하기까지 한 이로 노경임만한 이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역시나 노경임은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원익으로부터 무한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노경임은 교리(校理)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의 내직을 거쳐 예천군수, 공주목사, 풍기군수, 영해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명관이라는 칭송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3. 만고에 이름을 남기려면

1602년(선조 35)의 여름이었다. 왜란을 겪은 뒤의 나라는 뒤숭숭하기 그지없었고, 민심이 어지러운 만큼 더위도 독했다. 이에 노경임은 정신도 추스를 겸 7월의 한더위도 피할 겸 선산의 냉산에 올랐다. 냉산은 선산의 동쪽에 위치한 주요 요충지로 경관이 빼어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느낀 것이 많았던 노경임은 돌아오자마자 ‘등냉산기(登冷山記)’를 써내려갔다.

‘빼어난 경관을 변함없이 지켜온 냉산을 보라. 사람이 냉산처럼 불변하고, 그 이름을 오래도록 남기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영달을 이루어 화려하게 사는 것과 도덕을 닦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은가. 답은 도덕을 닦는 것이다. 한철 푸르렀다가 철이 지남과 동시에 시들어버리는 초목보다는 고금 불변하는 산이 좋듯이, 사람도 한때의 부귀영화보다는 만고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받쳐주지 않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혼란만이 있구나.”

지당한 지적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는 더 어지러워졌고, 이는 노경임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성주목사(星州牧使)였던 노경임이 스승 장현광의 심부름으로 정인홍(鄭仁弘)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정인홍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수제자, 임진왜란의 의병장, 북인 정권의 영수, 그리고 광해군 정권 출범 이후로는 왕의 남자. 그 만큼이나 걸출한 인물로 세도가 남다른 이가 바로 정인홍이었다. 하지만 노경임의 눈은 달랐다.

“대단히 간사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 발언이 화근이 되었다. 돌고 돌아서 정인홍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결국 노경임은 보복 차원에서 성주목사 직을 내놓아야만 했다.

“이 땅에 양심있는 선비가 설 곳이 어디 있으리.”

노경임은 미련 없이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낙동강 변의 숭암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을에는 냉악정사(冷嶽精舍)를 짓고, 강변에는 영귀정(永歸亭)을 지은 뒤, 그곳에서 학문에 몰두하다가 52세 되던 해에 세상과 하직했다. 저서로는 숭선지와 경암집이 있다. 그제야 조정에서는 아까운 이를 잃었다 안타까워하며 승정원도승지에 추증하였다. 서애 류성룡도 “내 평생 많은 사람을 보았으나 충직하고 순후하고 신중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은 노경임이 처음이다”라고 극찬했다.

도덕을 닦는 일은 타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고, 밤낮으로 스스로를 닦아세웠던 노경임은 지금도 후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구미 해평면 창림리의 송산서당에서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송산서원(松山書院)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고 송산서당을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
전. 조선왕조실록.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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