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열대야의 인문학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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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08   |  발행일 2018-08-08 제26면   |  수정 2018-08-08
단군 이래 가장 심한 열대야
인류 멸망의 신호탄일 수도
온실가스 배출을 못 줄이면
슈퍼열대야는 매년 반복돼
친자연적인 생활혁명 절실
[동대구로에서] 열대야의 인문학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좀 잤는가 싶었는데 깨어보니 아직 오전 2시40분. 실내 온도는 무려 30℃. 부리나케 샤워를 했지만 몸에 잠시 붙어있던 찬기운은 쉬 증발해버린다.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냉장고 문을 또 열었다. 얼음판을 통째로 비닐팩 안에 집어넣었다. 목덜미에 갖다 대고 얼음찜질을 했다. 결국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가동했다.

러닝셔츠도 벗어버린 야심한 밤, 잠은 달아나고 난 무슨 악령처럼 거실 바닥을 혼자 뒹굴거리고 있다. 내가 꼭 아프리카 원주민이 된 기분이다.

찌리릭~. 그 순간 정원의 담 밑에서 서늘한 소리가 솟구쳐 거실 창문을 두드린다. 초롱거리는 수은 빛깔의 귀뚜라미 소리다. 그 금속성 소리는 저승사자가 이승의 사정을 염탐하는 블랙박스의 ‘센서’ 같았다.

갑의 열대야와 을의 열대야. 갑자기 그런 구절이 생각났다. 열대야에도 빈익빈부익부가 있을 것 같다. 더위야 만인한테 공평하고 공정하게 다가서겠지만 그걸 맞이하는 방식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노숙자는 지금 어떤 열대야를 헤엄치고 있을까. 엄청난 빚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파산자의 열대야는 어떨까. 혼미하고 혼곤하고 그러면서도 외롭기만 한 그 후미진 독거노인의 열대야는 어떤 위세일까.

아무튼 단군 이래 초유의 열대야 사태인 것 같다. 열대야는 이제 객(客)이 아니라 ‘주인(主人)’이 된 것 같다. 자연한테는 한없이 불리한 현재 인류의 생활패턴을 볼 때 이 가공할 만한 열대야는 자연의 인류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포고의 서막인 것 같다.

그런 통계수치가 연일 공개되고 있다. 지난 1일 미국해양대기청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 주변 해수의 평균 온도는 30℃에 육박했다. 벌겋게 달궈진 바다의 사진. 핵폭탄보다 더 섬뜩했다. 자연과의 윈윈계약을 파기한, 오직 인간 맘대로의 편리문화를 추구한 것에 대한 ‘자연의 응징’이 본격화됐다는 시그널이 아닐까. 기상학자에 따르면 바다는 달궈진 지상의 열기 90% 이상을 식혀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올해 붉게 칠해진 바다는 바다의 쿨다운 기능에 무리가 있다는 걸 암시한 것. 바다가 육지를 식혀 주지 못하면 우린 상상을 초월하는 ‘슈퍼열대야’, 한겨울에는 ‘슈퍼냉대야’를 각오해야 된다는 메시지다. 우리 기상청도 “2070년쯤 한국의 여름은 5월12일~10월10일 무려 152일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여름이 최악의 열섬으로 변할 거란 경고다.

이 대략난감한 더위에 대한 해법이 오직 에어컨일까. 에어컨 사회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이 열대야는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벌이는 살육극이다. 자연은 하나의 ‘균형’이다. 그 균형의 인문학적 표현이 바로 ‘중용(中庸)’이다. 그 중용이 정의·정직·공정·평등의 덕목으로 심화되는 것이고 그 연장에서 인간의 자유도 자연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이 곧 자유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자본은 브레이크가 없다. 더욱 많은 이익을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자업자득 열대야’다. 인류가 친자연적으로 대변신하라는 경고다. 어쩌면 자연이 인간한테 보내는 최후통첩인 것 같다.

만성 미세먼지에 첨가된 만성 열대야. 우린 그걸 주홍글씨처럼 품고 살아야 하는가. 스마트폰이 우리 일상을 빛의 속도로 편리하게 분칠하는 사이, 자연은 더 이상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악마의 표정으로 급변 중이다.

이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시스템을 다시 성찰해봐야 될 날들인 것 같다. 존 레넌의 ‘Imagine’을 이렇게 바꿔 불러본다. ‘차가 없다면, 콘크리트집이 흙집으로 변한다면, 도로가 흙길로 변한다면, 1회용품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천국의 자연을 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대책 없는 열대야의 밤이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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