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3] 충과 효로 존경 받은 노경필·경륜 형제

  • 박관영
  • |
  • 입력 2018-08-02   |  발행일 2018-08-02 제12면   |  수정 2018-09-18
임진왜란 의병으로 활약한 형…8살에 부친 3년 시묘살이한 동생
20180802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낙동강 변에 자리 잡은 문산서원. 노수함을 비롯해 그의 아들 노경필, 노경륜을 배향하고 있다.
20180802
문산서원의 외삼문인 상지문(尙志門)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문산서원’ 현판을 단 4칸의 이학당(理學堂)이 보인다. 양옆으로는 각각 역락재(亦樂齋)와 시습재(時習齋)가 자리 잡고 있다.
20180802
문산서원의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에는 노수함과 아들 노경필, 노경륜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향사를 지내고 있다.
20180802
문산서원 마당 한쪽에는 노수함, 노경필, 노경륙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안강(경주)노씨 가문은 구미 선산에 정착한 후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중 노수함의 셋째 아들 노경필과 다섯째 아들 노경륜이 두각을 나타냈다. 노경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들과 의병을 모아 상주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안동부사로 부임해서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노경륜 역시 상주전투에 참전해 온 힘을 다했고,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여덟 살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노경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들과 3년 시묘살이를 해 주위의 칭찬이 대단했다. 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3편은 노경필·경륜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초 안강노씨 노종선 선산에 터잡아
학문 매진하며 벼슬 연연않는 가풍 정립

후손 노수함 6남1녀 중 셋째아들 경필
상주 전장서 왜군에 맞섰지만 역부족
전쟁을 겪으며 가치관 바꾸고 벼슬길
안동부사로 재직하며 ‘선정’ 베풀어

‘수신제가’에 힘쓴 다섯째아들 경륜
희생과 봉사로 어머니 96세까지 모셔


#1. 선산 독동리에 깃든 빛나는 별들

강력한 왕권하에 조선의 기틀이 단단하게 세워져가던 조선 초, 노종선(盧從善)은 낙향을 결심했다.

“세조와 성종, 두 임금을 모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할 터. 벼슬에 더는 미련이 없다.”

종4품의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승진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했지만, 노종선은 주저 없이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향했다. 노종선이 본향인 안강(安康)으로 가지 않고 선산을 택했던 이유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처가나 외가가 있는 마을로 거주지를 옮기곤 하던 시류의 영향이었다.

그렇다 해도 안강은 노종선에게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자신의 본향이기도 했지만, 경주에 속한 엄연한 현으로 노씨 집안의 영향력이 세를 크게 떨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훗날 폐현됨에 따라 안강을 기반으로 했던 안강노씨는 자연스럽게 경주노씨가 되었다.

노종선이 선산에 깃들었을 때, 그곳에는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의 인품을 알아보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노종선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높이는 동안 김굉필 등과도 친분을 나누는 등 많은 인재와 교류를 이루었다. 이후 노종선의 안강(경주)노씨는 후손인 노소종(盧紹宗)과 노희식(盧希軾)으로 세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선산의 독동리 문동에 완전히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선산 독동리 문동은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를 일컫는다. 독동리는 문동·고내미·거물리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문동마을은 글 잘하는 선비를 많이 배출했다고 해서 문동골 또는 문산(文山)이라고도 한다.

이윽고 노희식의 아들 노수함(盧守)의 때가 되었다. 노수함도 선대와 마찬가지로 벼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1540년(중종 35)에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에 전념할 따름이었다. 그런 노수함에게는 6남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아들들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노수함의 아들이 여섯 명이 아니라 여덟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최현이 쓴 일선지에는 ‘노수함이 송당 박영의 문인으로 경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아들이 6명인데 경준(景俊), 경인(景仁), 경필(景), 경건(景健), 경륜(景倫), 경임(景任)’이라고 했다. 또 셋째 아들인 노경필의 행장에 ‘노수함이 첫 아내 전의이씨(全義李氏)에게서 경준, 경인, 경필을 보았고, 그녀 사후에 들인 두 번째 아내 인동장씨(仁同張氏)에게서 경건, 경륜, 경임을 보았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순조 8년(1808)에 지은 노수함의 행장에는 일곱째 경전(景全)과 여덟째 경동(景仝)이 추가되었다. 이는 후대에 와서 2명을 추가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여섯 아들의 이름은 뒤의 글자가 모두 ‘ ’ 변으로 된 글자를 따른 반면, 나머지 두 아들의 이름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서자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노수함은 죽으면서 ‘성리군서잠명(性理群書箴銘)’을 남겼고, 현재 구미의 문산서원(文山書院)에 셋째 아들 경필, 다섯째 아들 경륜과 함께 모셔져 있다.

#2. 상주 전장(戰場)의 노경필

노수함의 셋째 아들 노경필(1554∼95)은 진실로 분노했다.

“손 놓고 앉아 있어서야 되겠는가. 나라가 쑥대밭이 되기 직전이거늘, 무어든 해야지.”

쑥대밭이 되기 직전이라는 표현은 지당했다. 임진년인 1592년(선조 25) 4월14일에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이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당시 노경필은 고향 선산에 머물고 있었다. 1573년(선조 6) 식년시에서 생원 2등 23위로 합격했지만, 그 또한 집안의 선대들과 한 가지로 벼슬에 욕심이 없었기에 일찌거니 내려온 터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다 하여 능서랑(陵署郞)에 임명되었으나, 그마저도 사양하고 부모님 봉양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풍전등화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론은 의병이었다.

“상황이 어떠하던가?”

뜻을 함께하기로 한 동생 노경임이 구해온 정보를 조곤조곤 말했다.

“상주목사 김해(金懈)가 도망갔다 합니다.”

“허. 무슨 그런 경우가 있는가.”

“그 바람에 덩달아 군사들마저 죄다 흩어지고, 판관(判官) 권길(權吉)만이 남아 지키고 있다 합니다.”

“하면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홀로 허덕이겠구나.”

“그럴 것입니다, 형님.”

왜군의 침입 사흘 만인 4월17일,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성응길(成應吉)과 조경(趙儆)은 각각 좌방어사(左防禦使)와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영남지방으로 급히 내려 보냈다. 이에 이일이 문경을 거쳐 23일 상주에 도착했는데 어이없게도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하여 이일이 급박하게 군사를 모으고 있다 합니다.”

“우리도 힘을 보태야겠군.”

“예, 형님. 죽을 힘을 다해야지요.”

노경필과 경임 형제는 서둘러 의병을 모아 함께 상주로 향했다. 우선은 주변의 도로를 꼼꼼하게 막는 데 집중했다. 화력이 부족한 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이는 주효해서 왜군의 발을 묶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상주전투 자체만 놓고 보면 불리해도 너무 불리한 싸움이었다. 이일이 창고를 열어 곡식을 푼 덕에 간신히 800여 명을 모아 급한 대로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는 터에 무장한 적과 싸워본 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대규모의 공격을 맞닥뜨리자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고, 상주는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전쟁을 겪으면서 노경필은 가치관을 새로이 정립했다. 그동안 벼슬에서 뚝 떨어져 살고자 했던 고집을 접고 벼슬을 받아들인 것이다.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아니라,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말이다. 이에 노경필은 1594년(선조 27), 부사(府使)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들고 안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정을 베푼 지 얼마 되지 않아 허망하게도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42세였다. 후손들도 그의 의기를 공경해 마지않았다. 노경필은 지금 구미의 문산서원(文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3. 가문의 든든한 구심점, 노경륜

“아버지를 잃었는데, 나이가 어리다 하여 그 슬픔과 예절이 덜하겠습니까?”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말에 장씨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안 그래도 속이 여린 아들의 애끓는 곡(哭)에 마음이 미어지던 차였다.

“저도 시묘를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어머니.”

아무리 어린 자식이라고는 해도 생전에 못다 한 효를 하겠다는 뜻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결국 노수함의 다섯째 아들이자 노경필의 동생인 노경륜(盧景倫, 1566∼1642)은 형들과 더불어 3년간의 시묘를 성심으로 이루었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주변을 밝혔던 노경륜은 학문에도 뜻이 높았다. 당시 걸출한 학자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 성주의 회연서원(會淵書院)에서 성리학에 대해 강론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였다. 노경륜은 바로 짐을 꾸려 성주로 달려가 그의 곁에서 학문을 수양했다. 그리고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도 가깝게 지내며 공부했다. 장현광은 어머니인 장씨 부인의 아우이자 노경륜의 형인 노경필과는 동갑내기 벗으로 서로 간에 친분이 두터웠다.

최선을 다해 학문을 닦은 덕분에 노경륜은 26살이 되던 해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하지만 곧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식솔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노경륜은 어머니와 가솔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4월에는 선산부의 동쪽 청화산으로, 6월에는 의성으로, 이후로는 상주의 백화산까지 참으로 고된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주전투에 합류해 형 노경필, 아우 노경임과 더불어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이 잦아들면서 노경륜은 다시금 학문에 집중했다. 서울에서 열린 회시(會試)와 별시(別試)에서 모두 급제하는 등 뛰어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벼슬길만큼은 순탄치 못했다. 형 노경필에 이어 형수까지, 집안에 상사(喪事)가 연이어 일어난 때문이었다.

노경륜은 마음을 비우고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을 기울였다. 형제들이 연달아 세상을 뜨면서 집안의 실질적인 지주가 된 이후로는 더한 성심으로 집안을 보살폈다. 노경륜의 손에서 안강(경주)노씨 가문은 보다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의 희생과 봉사는 어머니 장씨 부인이 96세로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계속되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리.”

환갑을 훌쩍 넘긴 노경륜은 하루도 빠짐없이 옛 성현들의 격언과 시론을 암송하는 것으로 하루를 이어갔다. 정갈한 옷차림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면 신선이 따로 없었다. 노경륜도 본인 스스로를 송학주인(松鶴主人)이라 일렀다. 소나무 숲에서 학을 벗 삼아 산다는 뜻이었다.

가르침도 노경륜을 닮아있었다.

“학문이란 평범한 데서, 실천할 곳에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정에서도 그런 노경륜의 학행을 높이 샀다. 1642년(인조 20)에 후릉참봉(厚陵參奉)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사령이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77세였다.

노수함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노경륜은 자신도 슬하에 6남2녀의 많은 자녀를 두었다. 생전에 둘째 아들을 형 노경필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도록 함으로써 형에 대한 의리를 드러냈다. 그리고 사후 150년이 흐른 1792년(정조 16)에 문산서원(文山書院)에 배향됐다. 이로써 노경륜은 아버지 노수함, 형 노경필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되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박홍갑의 논문 ‘경주노씨 성립과 그 일파의 선산지역 정착과정’,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