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5] 성주 무흘구곡(下)...회연서원·무학정·옥류정·무흘정사…구곡 곳곳에 정구 선생의 자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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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6 07:58  |  수정 2021-07-06 14:43  |  발행일 2018-07-26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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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곡 옥류동 주변 풍경. 정자 옥류정(玉流亭)이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솔숲이 좋다.

무흘구곡의 면모는 정각의 무흘구곡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령함 크게 쌓은 듯 신안(新安)의 수려한 모습/ 붉은 휘장에 그윽한 향기 남아 한 누각 맑도다/ 무이산을 관리하여 그 구곡 가까이 하니/ 구름 창(雲窓)에 맑은 시냇물 소리 들려오네’

정각은 이 서시에서 한강 정구를 떠올린다. 신안(新安)은 정구가 그토록 배우고 닮고자 했던 주자가 머물렀던 곳의 지명이다. 신안은 주자를 의미한다. 둘째 구의 강장(絳帳), 즉 붉은 휘장은 정구가 무흘에 지은 서운암(棲雲菴)을 가리킨다. 무이산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정구는 무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무흘에 살면서 상상 속에서 무이구곡을 가까이 했고, 정각은 그런 정구를 읊고 있는 것이다.

‘일곡이라 바위 가에 작은 배를 놓으니/ 활기찬 시내에 어부 노래 한가롭네/ 봉비암은 천 길이고 벽오동에 달 걸리니/ 아름다운 기운 모이고 저녁 안개 걷히네’

1곡 봉비암을 노래하고 있다. 봉비암은 회연서원 뒤의 야트막한 바위산이다.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이라고 해서 봉비암이라 불린다. 회연서원(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은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구가 1583년에 지어 제자를 가르치던 회연초당이 정구가 별세한 후 1627년 지방 유림의 여론에 따라 서원으로 건립된 것이다.

회연서원 옆에는 무흘구곡 표지석을 비롯해 김상진의 무흘구곡도와 정동박의 구곡시를 곡별로 담은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31세때 2곡에 한강정사 짓고 은거
朱子의 ‘한천정사’서 이름 따온 것

6곡 옥류동 바위 위 자리한 옥류정
숲·계곡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

7곡 만월담, 人家 멀리 떨어져 있어
초가삼간 세워 서책 두고 휴식처로
무흘정사도 지어‘서운암’편액 달아


◆한강 정구가 사랑한 2곡 한강대

‘이곡이라 하늘 닿을 듯한 만 길 봉우리/ 창파에 은은히 비치니 모두 원래 모습이네/ 행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유풍(遺風) 가득하니/ 그 위로 솔거문고(松琴) 몇 번이나 울렸는가’

2곡 한강대를 읊고 있다.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한 정구를 떠올리고 있다. 한강대는 1곡에서 1.5㎞ 정도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수륜면 수성2리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다. 산 정상에 있는 바위로 ‘한강대(寒岡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구는 31세 때(1573년) 마을 뒷산 산등성이에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지으면서 2곡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정사 이름을 ‘한강’의 ‘한(寒)’자는 주자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접고 학문에 매진했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가져 온 것이다.

정구는 한강정사에 머물면서 느낀 감흥을 ‘효기우음(曉起偶吟)’이라는 시로 읊었는데, 한강대 바위에 이 시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61세 때 한강대 북쪽에 숙야재(夙夜齋)를 짓고 62세 때는 오창정(五蒼亭)을 지었다. 한강대를 매우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3곡 무학정은 작은 바위산 위에 있다. 물가에 우뚝 솟은 이 바위는 배 모양을 하고 있어 선암(船巖), 즉 배바위라고 불렀다.

‘사곡이라 시냇가에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은 바위/ 멀리 보이는 산빛은 하늘 따라 길게 드리웠네/ 조화옹이 여기 와 온갖 재주 부리니/ 하얀 너럭바위와 푸른 연못 펼쳐놓았네’

4곡 입암은 3곡에서 대가천을 거슬러 4.2㎞ 정도 오르면 만난다. 물가에 촛대 같이 우뚝 솟은 바위로 ‘선바위’로도 불린다. 바위 아래 ‘입암(立巖)’이라 새겨져 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정구는 가야산 기행문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1579년)에서 입암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흰 돌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데 매끄럽기가 잘 다듬은 옥 같고, 푸른 물은 잔잔히 흐르는데 맑기가 밝은 거울 같다. 우뚝 솟은 바위는 높이가 오십 장쯤 된다. 비틀린 소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는데 늙었지만 키는 크지 못했다. 백옥 같은 너럭바위가 수면에 드러나 있고 삼사십 명은 앉을 만하다.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얼마 전에 구경한 홍류동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곡이라 시내 따라 길은 돌아 깊어지고/ 옥으로 깎은 듯한 꽃과 나무 숲을 이루네/ 첩첩이 웅크린 바위 그림처럼 기이하여/ 인간세상 부귀 탐하는 마음 사라지게 하네’

5곡 사인암의 풍광을 읊고 있다.

‘검은 구름이 걷히지 않고 가랑비가 잠깐 내렸다. 결책(決策)하며 말을 타고 사인암(舍人巖)을 찾으니 수석이 깨끗하고 상봉우리가 우뚝했다. 옛날 사인이 된 벼슬아치가 여기 수석의 승경을 사랑해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혹은 사신암(捨身巖)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신을 모두 잊고 인간세상의 몸을 버리고 이 땅과 인연을 길이 맺는다 한다. 하지만 모두 시골 사람들이 하는 말이어서 전하고 믿기에는 족하지 않다.’

정구는 ‘유가야산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인암(舍人巖)’이라고 했지만, 무흘구곡도에는 ‘사인암(捨印巖)’으로 되어 있다. 도로가 나면서 지금 사인암의 풍광은 크게 훼손된 상태다.

6곡 옥류동은 사인암에서 3.4㎞ 정도 오르면 만난다. 정자 옥류정(玉流亭)이 시냇가 바위 위에 날아갈 듯이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솔숲이 좋다. 계곡이 깊고 산과 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이 굽이부터는 김천시 영역이다.

◆7곡 만월담 아래 무흘정사 지어 은거

‘칠곡이라 맑은 못이 돌 여울에 이어지니/ 물 고인 곳을 고요한 가운데 바라보네/ 선생이 남긴 자취는 서운암에 있으니/ 맑은 기상 영원토록 푸르고 찬 물에 비치리라’

7곡 만월담에 서린 한강 정구의 학덕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흘은 성주 서쪽 수도산에 있으니 천석(泉石)이 맑고 깨끗하며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 선생이 이곳에 초가삼간을 세워 서책을 보관하고 쉬는 장소로 삼으니, 그 깊은 뜻은 사람들을 피해 있고 싶은 것이었다. 편액을 서운암(棲雲庵)이라 했다. 서운암 아래는 비설교(飛雪橋)와 만월담이 있고, 만월담 위에는 자이헌(自怡軒)이 있는데 나무를 얽어서 만들었다. 암자 동쪽에는 산천암(山泉庵)이 있다.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히는 소리 같다. 그 이름은 주자의 시 ‘밤에 산의 샘물 소리 배고 잤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정구는 62세에 무흘정사를 짓고 서운암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 무흘정사 아래에 만월담이 있다.

‘팔곡이라 용이 하늘로 오르고 비가 개려 하니/ 청라 깊은 곳에 물과 구름 휘도네/ 사람들 신공의 조화 알 수 있으니/ 하늘 땅에 베푸는 은혜 예부터 있어왔어라’

8곡 와룡암 굽이에는 이름처럼 용이 누워있는 듯한 암반이 펼쳐져 있다. 암반 바위 한 귀퉁이에는 ‘와룡암’이 새겨져 있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구곡이라 용추에서 물이 콸콸 떨어지니/ 신선대 아래서 시내의 근원이 시작되네/ 세속 근심 이 신령한 곳에 침범하는 것 싫어하여/ 마른 하늘 천둥 같은 소리 내어 동천을 지키네’

9곡 용추는 크게 높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위용을 자랑하는 멋진 폭포다. 정구는 이곳을 찾아 100여 척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았다. 그리고 폭포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왼쪽 가에 죽은 나무를 불태우고 공간을 마련해 ‘완폭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자리가 어딘지 지금 확인할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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