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3] 문경 대야산 선유구곡(下)...“8곡 난생뢰 반석 여울물 소리, 난새 탄 신선이 생황 연주하는 듯”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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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28 08:06  |  수정 2021-07-06 14:44  |  발행일 2018-06-28 제23면
20180628
선유구곡 중 8곡 난생뢰와 9곡 옥석대 주변 풍광. 난생뢰는 난새를 탄 신선이 부는 생황 소리가 들리는 여울이라는 의미고, 옥석은 신선이 남긴 신발을 말한다. 9곡 옥석대 주변 바위에 새겨진 ‘선유동(仙遊洞)’. 고운 최치원 글씨로 전한다(작은 사진).

‘못 위의 급한 물살 쏟아지며 이룬 물결/ 이 못에 이르러선 그 기세 잔잔하네/ 물결 보면 원래 이처럼 근원 있으니/ 차가운 수면 위로 내 마음 비춰보네.’

5곡 관란담은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세차게 내려온 물결이 이 못에 이르러 기세가 꺾이면서 잔잔한 수면을 만들어낸다. 이곳 물가 바위에 ‘관란담(觀瀾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뚜렷하지는 않다. ‘관란’은 물결을 본다는 의미인데, 관란은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 있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이 이는 여울을 보아야 한다. 해와 달은 밝은 빛이 있으니, 그 빛을 용납하는 곳에는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觀水有術 必觀其欒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주자는 맹자의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을 달았다. ‘이는 도에 근본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란(瀾)은 물의 여울이 급한 곳이다. 밝음이라는 것은 빛의 체(體)요, 빛은 밝음의 용(用)이다. 물의 여울을 보면 그 물의 근원에는 근본이 있음을 알게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용납하는 틈에는 비추지 아니하는 것이 없음을 보면 그 밝음에는 근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정태진은 이렇게 성리학자들처럼 물결을 바라보며 그 현상의 근원, 즉 도의 근원을 생각하고 도의 이치를 떠올리며 마음을 돌아본 것이다.

5곡에는 또 ‘관란담’이 새겨진 바위 옆 바위에 ‘김태영(金泰永)’을 비롯해 김씨 성을 가진 9명의 한자 이름과 함께 ‘구은대(九隱臺)’라는 글씨가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9명의 이름은 김태영 김상봉 김상련 김상홍 김상건 김진영 김무영 김석영 김종진.

이들은 순천김씨 가문 사람 아홉 노인으로, 일제시대인 1933년 4월 구로회를 만들고 이곳에 숨어들어 이렇게 새겼다. 이들은 이곳에 모사(茅舍)를 짓고 밭을 사서 여생을 마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정태진, 5곡 관란담 바라보며
성리학자처럼 道의 근원 생각

상주 출신으로 초야 은둔생활
남한조 기려 6곡 탁청대 노래

9곡 근처 바위엔 최치원 글씨


◆손재 남한조를 기리는 6곡 탁청대

‘탁청대 앞으로 흐르는 물에 일어나는 가는 물결/ 갓끈 한번 씻으니 만 가지 근심 가벼워지네/ 손재 선생 그날의 흥취를 상상해보니/ 푸른 물결 한 굽이서 오롯한 마음 밝아지네.’

6곡 탁청대에도 물가 바위에 ‘탁청대’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해서체다. ‘탁청’이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한 것이다. 강남으로 유배 와 있던 굴원이 거기서 만난 어부에게 다른 이는 다 옳지 않고 자신만이 곧음을 내세우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고 읊었다.

여기서 정태진이 떠올린 손재는 손재(損齋) 남한조(1744~1809)이다. 그는 탁청대 서쪽에 세심정을 지어 살았던 인물이다. 상주 출신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은둔하며 후진 교육에 힘쓴 선비였다.

‘물가에서 온종일 맑은 풍광 즐기다가/ 때때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네/ 기수(沂水) 무우(舞雩) 아니어도 뜻을 펼 수 있으니/ 영귀암 누대에서 자족하며 봄옷 펄럭이네.’

7곡 영귀암을 읊고 있다. 너럭바위에 ‘영귀암(詠歸巖)’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곳도 흰 바위들과 맑은 물의 풍광이 노래가 절로 나오게 한다.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영귀’는 공자와 증석(曾晳)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인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와 대화를 나누다 제자들에게 이루고 싶은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 다들 벼슬하며 펼쳐 보일 정치적 야망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증석은 그게 아니었다.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증석이 이렇게 말하자 공자는 감탄하며 ‘나도 점(點)과 함께 하리라’고 말했다. 점이 이름이고 석은 증점의 자이다. 정태진도 이런 뜻을 읊었다.

‘반석 여울 물소리는 생황을 연주하는 듯/ 여울 바닥에는 어렴풋이 신선 발자국 보이는 듯/ 예부터 신선 사는 곳은 기이하고 신비하다지만/ 구름 사이 닭소리 개소리 들리니 유안 같은 신선이겠지.’

7곡에서 4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나오는 8곡 난생뢰다. 이곳에도 난생뢰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아주 멋지다. 난생(鸞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난새와 악기인 생황을 뜻한다. 이는 곧 난새를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을 말한다. 뢰(瀨)는 여울이다. 이 여울에 흐르는 물소리를 신선의 피리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유안 이야기는 한나라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이 임종할 때 남긴 단약을 먹은 닭과 개도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유안은 신선의 도를 좋아해 팔공이라는 신선으로부터 불로장생의 선단(仙丹)을 제조하는 기술을 전해 받고 천신만고 끝에 그 기술을 연마해 스스로 대낮에 승천하게 되고, 골육지친 삼백여명도 함께 승천했다. 이때 집의 개와 닭들도 약 그릇에 묻은 것을 핥아 먹고 역시 함께 날아올라갔다는 내용이다.

◆9곡 옥석대는 신선이 신발 남긴 곳

‘계곡에 누운 반석 위에는 거울 같은 맑은 물/ 오목한 곳 폭포 떨어져 샘 되고 솟은 데는 옥석대 되었네/ 선인이 남긴 신발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섭현에서 날아온 오리 두 마리 있으리라.’

마지막 9곡은 옥석대다. 일부러 다듬어 만든 듯한 너럭바위에 ‘옥석대’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옥석은 옥으로 만든 신발을 말하며, 도를 얻은 사람이 남긴 유물을 의미한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안기생(安期生)은 낭야 부향(阜鄕) 사람이다. 동해에서 약을 파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천세옹(千歲翁)이라 불렀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유람을 갔을 때 안기생을 초청해 더불어 사흘 밤낮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기뻐하며 많은 황금과 벽옥을 하사했다. 이에 안기생은 상으로 받은 값진 보물들을 모두 부향의 역참 내에 남겨두고 말없이 떠났다. 그리고 떠나면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붉은 옥으로 만든 신발 한 켤레를 남긴 채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편지에는 ‘수 년 후 봉래산으로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쌍부섭현(雙鳧葉縣)은 ‘후한서’ 중 ‘왕교(王喬)’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후한 현종 때 왕교가 섭현의 원이 되었는데, 신술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와서 조회하는데, 명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거마를 볼 수 없으므로 태사를 시켜 지켜보게 했다. 태사는 왕교가 올 때는 오리 두 마리가 동남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했다. 이에 날아온 쌍오리를 그물로 잡으니 한 켤레의 신발뿐이었다고 한다.

옥석대 너럭바위 건너편에 솟은 바위에는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고운(孤雲) 최치원의 글씨로 전한다. 그리고 반대편 계곡 가에는 도암(陶菴) 이재(1680~1746)를 기려 세운 학천정(鶴泉亭)이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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