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5] 청송의 큰 스승 명지재 민추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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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27   |  발행일 2018-06-27 제13면   |  수정 2018-06-27
한평생 성리학 연구에 매진…‘덕문정로’‘사례찬요’ 등 저서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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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명지재 서당은 1922년 청송 안덕면 명당3리 당밑마을로 이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명지재는 민추의 호로, 그는 청송에 머물며 한 평생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작은사진은 ‘명지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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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재 서당이 자리한 명당3리 당밑마을 깊숙한 안쪽에는 민추의 강학지소로 알려진 명지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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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서당을 모태로 한 ‘송학서원’. 청송의 인재육성과 유림활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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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민추의 차남 민근효가 중건한 청송향교의 대성전.

길안천 변의 빠듯한 뭍이다. 찬연한 신성계곡을 10리 앞에 두고 멈춰 선 길섶이다. 우뚝한 산지봉(産芝峯)에 가만히 기대앉아 먼 남녘을 마주하는 땅이다. 거기에는 보름달처럼 육박해오는 보현산이 있다. 풍수가들은 저 산을 두고 ‘백관이 절을 하는 모습’이라 했고, ‘배산임수에 백관의 절을 받는 이 땅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 했다. 하여 마을 이름마저 ‘명당리(明堂里)’다. 이곳에 여흥민씨(驪興閔氏)가 터를 잡은 것은 조선 태종 때다.

#1. 여흥민씨 민추

여흥민씨는 고려 후기 명문세족으로 성장해 조선시대에는 태종비인 원경왕후를 비롯해 숙종 비인 인현왕후, 고종 비 명성왕후, 순종 비 순명왕후 등 4명의 왕후를 배출시킨 세도가다. 특히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여흥민씨 가문의 위상은 급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태종은 아내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동생이자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賜死)함으로써 성장해가던 외척 세력의 싹을 잘라낸다. 이때 민무질의 손자 민흥(閔興)은 간신히 멸문지화를 피했는데, 그는 계성군(鷄城君) 손사성(孫士晟)의 딸과 혼인해 청송 안덕의 명당리에 안착했다.

세종 중반 이후 여흥민씨의 위상은 완전히 복권된다. 그러나 몇 차례 조정의 부름에도 민흥은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은둔으로 일관하며 후손들에게 권력을 경계하고 학문에 힘쓸 것을 가르쳤다. 명당리의 민씨가문은 민흥의 장남 민세경(閔世卿), 손자 민상(閔祥), 그리고 증손인 민추(閔樞)로 이어져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청송에 세거하게 된다. 민흥의 차남 민세정(閔世貞)은 중종 조 조광조 등과 함께 세상을 바로 세울 뜻을 품었지만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낙향 후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민세경의 딸은 안동의 학자 청계(淸溪) 김진(金璡)과 결혼했는데, 이러한 경북 일대 명망가와의 혼맥은 학문을 숭상하는 가풍을 만들어 나가는 굳건한 기반이 되었다.


어릴적부터 영민했던 여흥민씨 민추
고모부이자 스승 김진에게 학문 배워
출세 뜻 두지 않고 후진 양성에 전념
청송 안덕 명당리에 ‘명지서당’ 열어
당시 일대 선비들 민추 문하에서 수학
동계 조형도·하음 신즙·덕계 이준성 등
민추의 제자로 오늘날에까지 ‘명성’



민흥의 증손 민추는 중종 때인 1526년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영민했던 그는 고모부인 김진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김진은 부인 민씨를 일찍 잃은 후 출세를 포기하고 자식교육과 학문수양에 정진했는데, 자신의 다섯 아들 모두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로 보낼 만큼 퇴계를 믿고 따랐다. 특히 김진의 넷째아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와 더불어 퇴계의 학맥을 정통으로 이은 인물이다.

민추는 고모부이자 스승인 김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학봉과 깊은 인연을 맺음으로써 퇴계가 지닌 학문적 통찰력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으며 영남학파의 사상에 공명했다. 민추는 스스로 수양을 통해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으며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그는 청송 안덕 명당리에 서당을 열고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사람들은 마을 앞 고개를 ‘서당고개’ 혹은 ‘명지고개’라 불렀다. ‘명지(明智)’란 ‘지혜에 밝다’는 뜻이다. 또한 명지는 바로 민추였다.

#2. 명지서당

민추의 자는 천극(天極) 호는 명지재(明智齋)다. 그는 맨 처음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서재 몇 동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는데 그것이 ‘명지서당’의 시초다. 그가 서당을 여는데 모범으로 삼은 것은 고려시대 최충(崔沖)의 구제학당(九齊學堂)이었다. 최충은 우리 역사에서 교육운동가이자 교육사상가로 내세울 수 있는 첫 번째 인물로, 개성에 구제학당을 설립해 고려의 교육과 문화의 개혁을 주도한 학자였다. 민추는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에 입각해 도학(道學)을 전수하는 데 힘썼다. 이로써 퇴계의 학풍이 청송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학생은 날로 증가했다.

서당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1568년, 지역의 유지들이 인재 양성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함에 따라 명지서당은 당시 안덕면의 중심이었던 장전리로 확장 이건되었다. 이때부터 서당은 지역유림의 관리 하에 있게 된다. 참봉 서기종(徐起宗)이 교장선생님 격인 산장(山長)을 맡았고 민추의 차남 구벽재(璧齋) 민근효(閔根孝)가 아버지를 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당시 청송 부사였던 김우굉(金宇宏)과 김홍미(金洪微) 등은 서당운영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시 일대의 선비 중 민추의 문하에서 배우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하음(河陰) 신즙(申楫), 풍애(風崖) 권익(權翊), 덕계(德溪) 이준성(李俊成) 등이 그의 제자로 오늘날까지 명성이 높다. 특히 동계와 하음은 관직에 나아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민추의 차남 민근효는 향교의 대성전과 동서재를 중건했고 청송부사 김홍미는 민추에게 예를 물어 향교의 위판을 새로 만들고 석전례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민추는 70세 되던 해 지역 유림의 천거로 통정(通政)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604년, 만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민추는 온 생애 동안 오직 성리학 연구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덕문정로(德門正路)’ ‘안인이인론(安仁利仁論)’ ‘강의록(講義錄)’ ‘태극무극변(太極無極辨)’ ‘이의변(利義辨)’ ‘하락수건곤설(河洛數乾坤說)’ ‘함항설(咸恒說)’ ‘사례찬요(四禮纂要)’ 등 많은 성리학 전문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인조 9년인 1631년 명지서당이 큰 화재로 전소되면서 그의 수많은 저서들 또한 불타고 말았다. 그때 민추의 손자 가산(可山) 민준건(閔後騫)이 할아버지의 서책들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싸여 세상을 뜨고 말았다.

#3. 명당리 명지재와 명지재 서당

화재 이후 서당은 1643년 명당2리에 중건되었다. 숙종 28년인 1702년에는 서당을 모태로 한 ‘송학서원(松鶴書院)’이 서당의 옛터(장전리)에 창건된다. 송학은 퇴계가 청송을 동경해 읊은 ‘청송백학수무분 벽수단산진유연(靑松白鶴雖無分 碧水丹山有緣)’에서 따온 이름이다. 송학서원은 이후 180년간 청송 산남(삼자현 이남) 일대의 유일한 서원으로 인재육성과 유림활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1882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지역 유림들은 서원을 서당으로 격하하고 ‘송학서당’과 ‘명지재 서당’으로 나누었다. 송학서당은 1928년 장전1리 창말에 이건한 후 최근 서원으로 새로이 정비했다. 명지재 서당은 1922년 명당3리 당밑마을에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 당밑마을 앞길에서 서당은 한눈에 보인다. 서당에서는 1950년대 초반까지 한학을 가르쳤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화주대(華柱臺:급제솟대)가 많았다고 한다. 현재 서당건물에는 ‘명지재’ 현판과 김진의 후손인 김형칠(金衡七)이 쓴 ‘명지재기’ 편액이 걸려 있다. 당밑마을 깊숙한 안쪽에는 네 칸의 간소한 건물 한 동이 있다. 청송군지와 누정록에 따르면 그곳이 ‘민추의 강학지소’인 ‘명지재’였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또한 후손들의 사정에 따라 각 장소의 기능과 쓰임이 변화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명지재 민추의 유풍을 잊지 않으려는 후손들의 근원적인 정신은 지속되고 있다. 지혜에 밝았던 명지재 민추는 명당리 산지봉 남쪽 산기슭에 잠들어 있다. 백관의 절을 받는 자리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청송군홈페이지. 입청송 여흥민씨선인록. 한국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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