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 누구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

  • 노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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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8 08:51  |  수정 2018-06-18 08:51  |  발행일 2018-06-18 제30면
[하프타임]  누구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
노인호 경제부 차장

1995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월에야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먼저 다니고 있던 장수생(‘사’자가 재수 없다며 삼수생 이상을 그렇게 불렀다) 형들은 재수생의 자세부터 가르쳐주겠다며 ‘테스트’에 나섰다. 책상 위에서 바닥으로 볼펜을 굴렸고, 교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낸 뒤에야 볼펜은 멈췄다. 그들은 그 장면을 설명하라고 했다. “책상에 있던 볼펜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라고 말하자 장수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라마 안돼”라고 외쳤다. 고3은 그렇게 말해도 되지만, 재수생은 “책상에 있던 볼펜이 굴러서 바닥에 달라붙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한번 떨어져본 놈의 입에서 절대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면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부동산을 담당하면서 이 경험이 떠오른 건 ‘로또 분양’이라는 말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로또 분양이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로또 분양은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고분양가 관리지역으로 지정하거나 공공택지에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되면서 주변 아파트 시세보다 싼 가격에 분양되는 신규 아파트에 청약과열과 투기 등의 부작용이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에는 정부가 무리하게 분양가를 억눌러 그 부작용으로 투기 광풍이 생겼다는 부정적인 해석과 책임 전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거기다 서민들의 수준에선 높은 분양가임에도 ‘로또’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주변 시세보다는 그래도 싸다’는 이유를 들어 건설사가 분양가를 올리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하지만 이런 ‘로또 분양’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분양가를 마음껏 올리지 못해 수익이 줄어들게 된 건설사밖에 없다.

투기과열지구인 수성구는 등기를 해야 팔 수 있는 탓에 분양을 받은 뒤 2년6개월은 지나야 매매할 수 있다. 단기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 세력이라고 보긴 힘들다. 3년 가까이 고생해서 시세차익을 좀 누렸다고 치자. 그래봤자 건설사가 얻는 이익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실상 로또는 건설사가 당첨되는 것이고 시민들은 건설사가 가져갈 수백억원짜리 로또의 일부를 나눠가지는 정도다. 실소유자 사이에 끼어있는 투기세력문제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속담으로 대신하면 될 듯하다.

‘주변시세보다 싸다’는 주장은 또 어떤가. 시세가 형성된 주변 아파트는 이미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았고, 당장 거래가 가능한 실재하는 물건인 반면 분양 아파트는 팔지도 들어가 살지도 못한다. 다시말해 주변 아파트가 현금이라면, 분양 아파트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6개월짜리 어음 또는 대박과 휴지조각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비상장 주식인 셈이다.

로또 분양은 따지고 보면 분양가가 억제돼 비교적 싼 가격으로 신규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으니 서민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내집 마련 기회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떨어지는 것이 바닥에 달라붙는 것이듯, 누군가에게는 로또 분양이 착한 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건설사가 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로또 분양은 또 하나의 보험 분양일 수 있다.
노인호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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