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1991년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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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4   |  발행일 2018-06-14 제30면   |  수정 2018-06-14
성폭력은 권력관계서 발생
홍대 男누드모델 사건이후
벌어지는 무의미한 말싸움
날카로운 남녀의 性대결은
미투운동의 본질과는 거리
[여성칼럼] 1991년 그 이후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 증언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초로 국제 사회에 제기된 날이었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변호사 아니타 힐이 연방대법관 인준 청문회에서 자신의 상사이자 대법관 후보인 클래런스 토마스의 성희롱을 고발했다. 직장 내 성희롱을 처음으로 알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해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정조를 잃은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타향을 떠돌던 위안부들을 기리는 ‘세계 위안부의 날(8월14일)’은 2012년이 되어서야 제정되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는 그 양상이 다를 뿐 인종과 계층을 따지지 않는다. 지식인이자 전문직을 가진 아니타 힐은 문제제기와 발언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조건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청문회에 참석한 14인의 상원의원이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양성평등 확산을 위한 여러 위원회의 위원들이 거의 남성이고, 피해 당사자는 배제된 채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남성들이 진단하고 판단한다. 이러한 현실은 곧 편향된 역사로 남을 것이니만큼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허스토리(Her story)를 복원해야 한다.

오랜 세월 부당한 폭력을 겪고도 외면당해 온 여성들의 분노는 미투 운동이 전개되면서 폭발했다. 끊이지 않는 고백과 증언, 그리고 폭로는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져 왔음을 입증해 준다. 그런데 최근 발생한 홍익대 미술대학 실기시간에 몰래 촬영한 남성 누드모델의 사진이 유포된 사건은 ‘일상적 성폭력’에 대한 접근방식을 고민하게 해준다. 여성 모델이 저지른 이 사건을 둘러싸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이어졌는데, 청원자는 피해자가 여성이었던 사건들과는 달리 빠르게 진행되는 경찰 수사를 지켜보면서 “피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수사를 달리하는 국가에서는 남성 역시 안전하지 않다. 누구나 범죄를 저질렀다면 벌을 받고, 누구나 피해자가 되었다면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을 절실히 바란다”고 청원 이유를 밝혔다.

취지와는 달리 이 청원으로 인해 남녀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남성들은 사진 유출자가 여성이라는 점, ‘워마드’와 같은 남성혐오 사이트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를 조롱하고 희화화한다는 점을 들어 여성을 비난하고 있다. 이에 여성들은 대다수 성범죄는 여성이 피해자이고 경찰 수사가 불평등하다고 주장하고, 남성들은 다시 이를 “과도한 피해의식”이라고 반박하며 대립하고 있다.

실타래처럼 꼬인 일을 풀려면 본질을 상기해야 한다. 연일 사회면에 오르는 기사에서 보다시피 성폭력은 이성 간뿐만 아니라 동성 간, 그리고 또래집단 내에서도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 데이비드 매멧의 희곡 ‘올리아나’에는 여대생이 전문용어와 무신경한 성차별적 표현으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교수를 역으로 공격하며 궁지로 모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남성을 성추행범으로 몰아가는 파렴치한 여성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생-제자 관계에 잠재하는 권력관계, 즉 권위와 전문성, 그리고 힘의 우위로 제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인지한 제자가 ‘스승’의 방식으로 스승에게 반격하는 장면을 통해 성폭력이란 권력에 의지한 강제적 폭력임을 보이기 위한 설정이다. 2인극 ‘올리아나’는 선생과 제자 모두 피해자로 남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선생은 자신의 제자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억압을 당하고, 제자는 자신을 억압했던 선생을 닮게 된 것이다.

홍대 누드모델 사진유출사건 이후 벌어지는 무의미한 말싸움이나 날카로운 성대결은 미투 운동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여성인권 향상에 대한 열망이 극단적 남성 혐오로 이어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성 또한 역사적으로 약자이자 피해자였던 여성의 고통과 상처를 외면한 채 당장의 억울함이나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여성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거나 비하해서는 안 된다.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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