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3] 직언과 청렴의 상징 송와 이종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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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6   |  발행일 2018-06-06 제11면   |  수정 2018-06-06
“전하께서 처음과 끝이 같지 않습니다” 직언 서슴지 않은 충신
[인재의 고장 청송 .3] 직언과 청렴의 상징 송와 이종윤
송와 이종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재.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이종윤의 묘소 아래에 위치해 있다. 동쪽의 평온한 구릉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으며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인재의 고장 청송 .3] 직언과 청렴의 상징 송와 이종윤
이종윤이 세조 14년인 1468년 문과에 급제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청송 문거리 골짜기의 남쪽 끝에 마을을 감싸는 안산이 솟아 있다. “제비가 날아가는 모습이라 제비혈이라 하지요. 그 목덜미에 그 어른 묘소가 있어. 오르기는 쉽지 않아”. ‘그 어른’이란 500년 전 조선 성종 때 사람 월성이씨 이종윤(李從允)이다. 산 아래 묘소를 바라보는 자리에는 그를 기억하는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수수하나 반듯한 그 재실은 숱한 세월이 지나도 그를 따르고 그리워하는 후손들이 있음을 말해준다.

월성이씨 청송 입향조 월성군 이정견의 손자
안덕 문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라
세조 8년 생원·진사시 합격 1468년 문과 급제
제주목사 시절 선물 일절 금지하고 부역 줄여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해 도민 칭송
2년 임기 만료후 도민 간청으로 유임되기도
후대에 월성이씨 가문 가장 빛낸 인물로 기억

#1. 보현산 아래서 글을 읽다

월성이씨 청송 입향조는 고려 말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해 첨서밀직사를 지낸 월성군 이정견(李廷堅)이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으며 포은 정몽주와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이정견의 아들은 이형(李衡)으로 정몽주에게 수학하고 함창현감을 지냈다. 그는 청렴과 검약을 숭상한 사람이었으며 포은의 순절과 혼란한 시절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청송 보현산 아래 은거했다고 한다. 이형의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명리(權明利)의 딸이다.

이종윤은 이형과 안동권씨의 아들로 세종 13년인 1431년에 태어났다. 호는 송와(松窩), 자는 가정(可貞)이다. 하지만 그의 조부 이정견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차이가 있다. 국조문과방목에 따르면 이종윤의 조부는 이원길, 증조부는 이을충, 4대조가 이정견으로 나온다. 씨족원류 경주이씨 편, 청송군홈페이지, 이종윤의 묘비명에 조부는 이정견으로 되어 있다.

이종윤은 외조부 권명리의 터전이었던 안덕 문거리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젊었을 때 고을의 사우들과 함께 보현산 아래에서 글을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이씨산방’이라 불렀다. 이후 이종윤은 세조 8년인 1462년에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해 영창전참봉(永昌殿參奉)을 거쳐 예빈시경력(禮賓寺經歷)이 됐다.

그는 성종 1년인 1470년에 ‘직언으로 인해 장기에 귀양갔다’고 한다. 묘비명에는 ‘바른말을 하다가 장기현감으로 쫓겨났다’고 되어 있는데 그의 직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2년 뒤인 1472년에 풀려난 그는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가 되었고, 1475년부터는 예조좌랑과 정랑을 지냈다. 1482년에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었고, 1483년에 봉렬대부(奉列大夫)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489년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이어 집의(執義)에 올랐다. 1490년에 세자시강원의 보덕(輔德)을 겸해 통정대부(通政大夫)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964년에 후손 찬우(贊雨), 형우(亨雨) 등이 편집 간행한 이종윤의 시문집 ‘송와집(松窩集)’이 있다. 시문은 몇 편 되지 않지만, 궁중에서 횡행되는 부조리와 부패해지는 정국의 시책을 지적해 그 시정을 촉구한 글과 과거제도의 폐단, 불교의 과신을 금하자는 주장,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있는 지리적 환경을 설명하면서 빈번한 왜적의 침범을 방비할 계책과 인재등용에 대한 소견 등이 실려있다. 그의 강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사간원 헌납시절에는 임금에게도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강직한 관료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전하께서 처음과 끝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은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자들이 이로 인하여 적중되었다고 할까 두렵습니다’ ‘금년은 흉년인데 회례연(會禮宴)을 행하는 것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종윤은 매사에 청렴하고 신중한 사람이었고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2. 제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풀다

이종윤이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그는 만 60세였다. 제주에서 그는 일체의 선물을 금지하고 공물 및 부역을 줄였다. 특히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해 도민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예를 중요하게 여기고 성품이 검소하여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다. 제주의 명환(名宦)으로 기억될 만큼 뛰어난 통치력을 보여준 그는 2년 뒤 임기가 만료되자 제주도민들의 간청으로 유임되기도 했다.

성종실록에는 제주 백성 양효손(梁孝孫) 등 300여명이 목사 이종윤의 유임을 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전번의 목사(牧使)들은 모두 군무(軍務)에만 뜻을 두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판관(判官)에게 일임하였는데, 이번에 온 목사 이종윤(李從允)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는 판관 김세균과 함께 일을 처리하며, 민간의 소송(訴訟)에 관한 일도 온종일 직접 판결하여 소송이 지체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옥에는 억울한 백성이 없고 유민(流民)들은 스스로 돌아오며 생활이 안정되고 생업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 벼슬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유모(乳母)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유임(留任)하게 해주소서.’

이에 이조(吏曹)와 승정원(承政院)에서도 ‘이종윤은 과연 어집니다’하니 임금은 그를 포상하게 하고 당표리(唐表裏·중국산 비단)를 하사하며 3년 유임을 명하였다.

이종윤은 4년4개월 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했다. 이는 고종 때 부임했던 백낙연 목사와 함께 조선시대 제주목사 중 최장수 재임 기록이다. 하지만 그는 1494년에 12월14일에 재임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고향 청송으로 운구되어 묻혔다. ‘제주명환기(濟州名宦記)’에는 ‘정사를 청렴하고 간략하게 하기를 숭상하여 아전들이 사랑하고 백성들이 기꺼워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상소하여 유임을 요청하였는데 마침내 임지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몹시 애석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종윤의 사망연도 역시 기록물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청송군 홈페이지에는 1490년으로 적혀있다.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는 1494년,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 역사인물 소개에는 1494년 12월14일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묘비명에는 연산1년인 1495년 12월23일 장사지냈다고 적혀 있다. 연산군일기 3권, 연산 1년 2월22일 병자 2번째 기사(1495년 명 홍치(弘治) 8년)에 ‘죽은 제주목사 이종윤의 아내 김씨가 관의 녹봉으로 상사 지내기를 청하다’는 내용이 있다.

#3. 그를 기리는 추모재

이종윤은 청송 안덕면 문거리 안산에 묻혔다.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따 문거산이라 부르는데, 그곳에 5대조의 묘소가 함께 있다. 이종윤의 묘갈문은 홍문관 직제학이었던 표연말(表沿沫)이 썼다. 아버지 이형과 조부 이정견의 묘는 이웃한 안덕면 복리(福里)에 위치한다. 이종윤의 묘소 아래에 있는 재실 추모재는 1900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동쪽의 평온한 구릉을 바라보며 자리한다. 옛날에는 재사를 마을 입구에 지었는데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황폐해지자 후손들이 강당을 지어 강학소로 삼았다고 한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으로 열었고 양쪽에 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반 칸 툇마루를 놓고 머름 형 평난간을 둘렀다. 오른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경역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으로 구획되어 있고, 담장 밖 오른쪽에 새로 지은 3칸 규모의 주사가 있다. 재사는 특별한 것 없이 수수하고 단정하다. 콘크리트 기단과 말쑥한 담장은 근래의 보수단장을 의미한다. 이종윤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훨씬 지났다. 바라보아서 고운 것은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재실은 기억하는 집이다.

이종윤의 후손들은 17세기 중엽까지 300여 년간 청송에서 세거하다 그의 증손 대에 이르러 타지로 흩어져 일부만이 남았다. 경주 강동면 단구리에는 이세기(李世基)를 주벽으로 하고 이천(李)과 이종윤을 모시는 단구서원이 있다. 이종윤의 기록에 ‘모현사(慕賢祠)에 봉안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단구서원은 원래 철종 13년인 1862년 이종윤을 제향하는 모현서당(慕賢書堂)으로 건립된 것이다.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훼철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고 1983년에 중창하여 매년 3월 초경(初庚)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종윤은 월성이씨가 청송으로 들어온 이래 가장 가문을 빛낸 인물로 기억된다. 사람들은 그를 송와(松窩) 혹은 가정(可貞)이라 호명했다. 그것은 그가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는 청렴한 사람이었고, 옳고 곧은 사람이었다는 목소리였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조선왕조실록. 한국국학진흥 원. 동경잡기.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 국조문과방목.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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