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2] 학자로 명성 떨친 손사성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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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30   |  발행일 2018-05-30 제15면   |  수정 2018-05-30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40여 년 관직생활 대부분 승문원 몸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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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안덕면 문거리에 자리한 문거재. 한평생 학문을 연구하며 학자로 명성을 떨친 계성군 손사성과 그의 부인 안동권씨의 묘재(墓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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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안덕면 문거리 뒷산에 있는 손사성의 묘소. 그의 묘갈에는 ‘청명(淸名)으로 당세에 중함을 입었다’고 새겨져 있다.

청송 안덕면 문거리(文居里) 입구에서 당산 맞은편 산을 오르면 하늘과 마주 보는 높지 않은 마루에 검은 비신의 신도비를 가진 묘가 있다. 봉분은 한 송이 무궁화가 조각된 호석을 둘렀고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한 쌍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예와 정성을 갖춘 이 묘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학자 손사성(孫士晟)의 묘다. 그의 묘갈에는 ‘청명(淸名)으로 당세에 중함을 입었다’고 새겨져 있다.

#1. 청송에 정착한 손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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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거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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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사성이 세종 5년인 142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경주손씨 손사성은 조선 태조 4년인 139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내고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된 손등(孫登)이다. 어머니는 영해박씨(寧海朴氏)로 호장(戶長) 박시우(朴時遇)의 딸이다. 조부는 손현검(孫玄儉)으로 가정대부검교중추원부사(嘉靖大夫檢校中樞院副使)를 지냈다. 선대로부터 상주에 자리 잡고 있던 손사성은 청송 안덕에서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안동권씨 권명리(權明利)의 딸과 혼인하면서 안덕 문거리로 이거하게 된다.


권명리 딸과 혼인후 안덕 문거리로 이거
20세에 司馬試 합격·세종5년 문과급제
이전에 이미 정7품 승문원 박사로 재직
정6품 사헌부 감찰 오르기까지 15년이상
외교문서‘吏文’전담 외교관으로 일해
이후 행통정대부 병조참의로 벼슬 물러나
훗날 차남 손소도 문과급제 승문원 근무
손사성 청렴한 정신 후대에 이어져 존경



손사성은 20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세종 5년인 142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동진사(同進士) 22위였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따르면 그는 문과급제 전에 이미 종묘부령(宗廟副令)을 지냈다. 세종 5년 문과급제 때에는 승문원(承文院) 박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일명 손사명(孫士明)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과급제 이전에 문관이 담당하는 정7품 승문원 박사에 임용되었다는 것은 그의 특별한 학자적 재능을 가늠케 한다. 승문원 박사로서의 손사성은 외교문서인 이문(吏文)을 전담한 전문가이자 외교관이었다.

#2. 이문 전문가로 한평생

이문은 원(元)대 몽고의 북경구어체를 관용 문어체로 표현한 것으로 명(明)대 이후 공문의 문체로 보편화된 문자다. 즉 전통한문이 아니라 구어체 중국어가 혼합되어 있는 복잡한 언어였다. 원·명·청(淸) 등의 중국 왕조는 고려를 비롯해 조선과의 외교문서에 이문을 사용했다. 특히 조선시대 이문은 그러한 외교문서의 독특한 문체를 의미함과 동시에 외교문서 자체를 의미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연구한 인재가 아니고는 이문의 이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조공체제의 외교관계에서 예식을 갖춘 외교문서에 대한 관심은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 중대사였다.

이문의 연구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은 승문원에서 담당했다. 조선 초기의 승문원에서는 젊은 관리들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그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손사성은 세종 5년 문과 급제 이전부터 세종 20년인 1438년 정6품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오르기까지 15년 이상을 승문원 박사로 재직했다. 사헌부로 옮겨간 3년 후 그는 세종의 명에 의해 천거돼 승문원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관직은 종5품 승문원 교리(校理)였다. 그에 대한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부분이다. 여전히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승문원 학자들의 이문 연구가 조선 초기 역학(譯學)의 발전과 음운 연구를 촉진시켰고 그 학문적 성과가 음성언어로서의 우리말에 대한 연구를 통한 훈민정음 창제의 학문적 기반을 조성했다고 보고 있다.

손사성은 세종 25년인 1443년에 정5품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에, 이듬해인 1444년 사간원 우헌납(右獻納)에 올랐다. 세조 5년인 1459년 그의 관직은 종3품 승문원 지사(知事)였다. 나이 63세의 노관(老臣)이었다. 그해 그의 차남 손소(孫昭)가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훗날 김종직은 손소의 묘갈명에 ‘부자가 같은 관청에 근무하게 되어 매우 아름다운 광경으로 칭송되었다’고 했으며 ‘손사성은 시골에서 능히 분기해 탁연히 우뚝 입신했다’고 했다.

이후 손사성은 행통정대부(行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로 벼슬을 떠났다. 그는 40여 년간의 관직생활 중 대부분을 승문원에서 보냈다. 이문의 연구와 제술, 습독에 평생을 바친 이문가로서의 관직생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일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의 자리는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한 사람에게 제수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3. 청백으로 청명을 잇다

손사성은 성종 8년인 1477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문거리 뒷산(後山) 유좌(酉坐)’로, 유좌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동쪽을 바라보는 자리이며 흰색을 상징한다. 마을 안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근래에 들어선 집들 뒤편에 차분히 정좌한 재실이 있다. 계성군 손사성과 그의 부인 안동권씨의 묘재(墓齋)다. 묘하의 재실은 여러 번 중수를 거쳤고 최근에는 1970년과 1990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소박하고 단아한 건물이다. 전면에는 난간 없는 툇마루를 길게 깔았고 한 칸 대청에는 문을 달아 기능을 더했다. 거기에 ‘문거재(文居齋)’ 현판이 걸려 있다. 글 읽던 사람의 재실이다. 조선 초부터 수백 년을 이어온 오늘의 문거재는 기울어지거나 해진 곳 하나 없이 정갈한 모습이다. 이는 그 후손들의 덕일 것이다.

특히 손사성의 청렴한 정신은 후대에 이어져 존경을 받았다. 그의 장남은 손욱(孫旭), 차남은 손소(孫昭)다. 손욱은 단종 1년에 문과 급제해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전사했다. 그를 따르던 종사관과 부하들은 한 사람도 적에게 항복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는 병조에 명해 장사를 후하게 치르고 예조에서 치제(致祭)토록 했다고 한다.

손소는 세조 5년에 급제해 형과 함께 이시애의 난에 출정했으며 평정하고 돌아온 후 공신(功臣)의 호를 받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 계천군(溪川君)에 봉해졌다. 손소는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이 극진해 성주목사 시절에는 주민들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손사성의 상을 당한 중 병을 얻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왕은 여전히 그에게 녹(祿)을 내렸으며 아버지 손사성은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輔祚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계성군(鷄城君)에 증직됐다.

손소의 둘째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역시 청백리의 명성을 이었다. 그는 조선 명현의 한 사람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간관(諫官)들이 모두 쫓겨날 때 파직 당한 인물이다. 그는 중종반정 이후 복직해 상주목사가 되었는데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추모할 만큼 덕이 깊었다. 손중돈의 현손 손종로는 무과에 급제했으나 광해군 10년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는 부모를 모시며 농사를 짓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분기해 쌍령싸움에서 전사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손사성의 외증손이다. 그가 1530년경 청도 객관의 누대인 청덕루(淸德樓)에 지은 시에 ‘둘러보며 맑은 덕을 사모하는데(徘徊慕淸德)/ 시를 남긴 분들 중에 손후가 있네(留詠有孫侯)’라는 구절이 있다. 이언적은 문집인 회재집(晦齋集)에 시에 대한 짧은 주석을 남겼는데 ‘외증조 계성군(손사성)이 일찍이 이 고을 수령을 역임했는데 시를 남긴 바 있다. 손씨(孫氏)가 대대로 청백리로 이름을 드러냈는데, 누대의 이름이 실제로 서로 부합하므로 언급한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청명(淸名)으로 당세에 중함을 입었다’고 한 손사성의 묘갈은 손중돈의 후손인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이 썼다. 그는 ‘손씨는 대대 청백으로 유명했지만 아 무엇으로 증표를 삼을 수 있으랴’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으니 공훈도 있고 덕망도 있도다. 근원이 아니면 어찌 흐르며 심지 아니하면 어찌 수확하리.’ 이는 면면히 흘러온 청백의 근원이 ‘청명’에 있음을 찬한 것이리라.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김학수, 영남학인 손덕승의 학자 관료적 성격, 퇴계학과 유교문화, 2015. 손오규, 이문가 손사성과 지정조격, 유학고전의 현대적 조명,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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