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예천 백송리 선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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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8   |  발행일 2018-05-18 제36면   |  수정 2018-05-18
대문 열면 가파른 석벽…내성천 굽어보며 詩를 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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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변의 선몽대. 우암 이열도가 1563년에 지었고 1967년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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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안은 가파른 석벽, 선몽대는 절벽에 걸터앉아 내성천 모래밭을 내다보고 있다.

물 댄 논들이 깊다. 다랑논 삿갓배미도 가없는 하늘이다. 연둣빛 싹 그득 품은 모판들 논가에 간잔지런히 앉았고, 길가엔 비료포대들 탑마냥 우뚝하다. 저기 육모장에 머리 맞댄 농부들은 모내기를 궁리 중이겠고, 또 저기 써레질 하는 농부는 마음이 바쁘겠다. 여기 논둑에는 노랑 들꽃들 담뿍하고, 먼 봄산은 포슬포슬하다. 924번 지방도 예천 가는 길, 굽이져 천천히 달리니 모든 풍경이 장장하다.

이정표 따라온 샛길 앞 호수 같은 논
논 가장자리 들어선 흰 소나무 마을
많다던 백송은 없지만 소나무 숲 향연
내성천 물길과 십리에 이르는 백사장

퇴계 從孫 우암, 신선 내려와 노는 꿈
가파르게 솟은 푸른 석벽 선몽대 자리
다산 정약용 부친과 함께 이곳에 올라
200여년 전 쓴 선대의 詩 발견하기도


◆백송리 이열도

호수인가 했다, 반듯한 논두렁 보고도 못 본 듯. 선몽대(仙夢臺) 이정표 따라 샛길로 들어섰더니 곧장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호수 같은 논이다. 마을의 와락 등장은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숫접게 반갑다. 집들은 논의 서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들어앉아 가만 봄물 깊어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호명면(虎鳴面) 백송리(白松里), 호랑이 울음소리 들리는 곳의 흰 소나무 마을이다.

사방 야트막한 산이다. 서쪽엔 건지산 운봉산, 동쪽에는 우암산 석교산, 북쪽에는 삼봉산, 그 줄기들이 찬찬히 흘러 감싸안아 마을은 제비집 같다. 많았다는 백송은 보이지 않는다. 백송은 흰 솔, 행솔로 변해 지금은 행소리라고도 부른다.

북쪽 산 너머에는 내성천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한때는 천변의 백사장이 반짝거린다고 백금리(白金里)라고도 했다. 내성천 백금을 찾아 논둑길 따라 간다. 길은 은행나무 길, 벼 익고 잎 물들 무렵 마을은 황금덩어리 같겠다.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진성이씨(眞城李氏)다. 입향조는 퇴계의 둘째형 이하(李河)의 차남 이굉(李宏)이다. 그는 1530년 즈음 백송리로 들어와 1538년에 아들을 낳았다.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다. 그는 선조 9년 별시에 문과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형조정랑(刑曹正郞), 고령현감, 경산현감 등을 지냈다. 관리로서는 청렴 강직했고 아들로서는 효성이 지극했으며 당대 명필이었다고 한다. 그가 경산 현감이었을 때의 일이다. 관찰사가 불러서 갔더니 책 제목을 써 달라고 했단다. 우암은 “글씨 쓰는 것으로 나를 오라 하였는가”하고는 탕건을 벗어던지곤 고향 백송으로 돌아왔다. 공과 사가 분명한, 꼬장꼬장한 선비였다. 그리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선몽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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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몽대 숲의 ‘선대동천(仙臺洞天)’ 비.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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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한 북풍을 막아주는 내성천 변의 선몽대 숲. 선몽대가 지어진 즈음 조성되었다.



은행나무길이 끝나면 다시 울창한 가로수길이다. 마을에서부터 내성천으로 향하는 개울과 정성들여 갈아놓은 골짜기의 밭 사이에 길은 운치 있게 놓여 있다. 청량한 그늘이 끝나면 문이 활짝 열리듯 내성천 물길과 십리에 이른다는 백사장과 빼어난 소나무들의 숲이 펼쳐진다. 넓은 것은 낮고 높은 것은 그윽하여 안온한 세상이다.

소나무 숲은 천변을 따라 150m 정도 넓고 길게 조성되어 있다.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허한 북풍의 기운을 막아준다. 언젠가 제방을 쌓으면서 나무줄기가 상당한 깊이로 묻혔다고 한다. 줄기 부분이 흙에 묻히면 나무뿌리와 줄기는 숨을 쉬지 못하고 끝내는 말라 죽는다. 이곳의 몇몇 나무들은 밑동 주위에 자연석을 두르고 얕은 못처럼 파 놓았다. 숨 쉬시라는, 오래 사시라는 배려다. 쉬이 보기 어려운 굵은 줄기와 거북 등 같은 수피가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무들의 시간을 가늠케 한다.

송림에는 두 개의 비(碑)가 있다. 하나는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새겨진 비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라는 의미다. 단순한 각자의 완벽한 설명이다. 송림이 끝날 무렵 우암의 기념비가 있고, 멀지 않은 천변에 선몽대가 보인다. 선몽대는 우암산이 내성천으로 뛰어드는 벼랑에 자리한다.

◆선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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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마을의 물 댄 논이 호수 같다. 논둑 은행나무 길 따라 선몽대로 간다.



대문간 앞이 온통 민들레 꽃밭이다. 은빛 갓털이 폴폴 날려 세계는 저절로 선계다. 대문은 잠겨있어 좁은 옆길로 들어간다. 대문 안은 가파르게 솟은 푸른 석벽, 선몽대는 절벽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뻗고 있다. 선몽대에 오를 수는 없다. 그러나 석벽을 쪼아 만든 계단을 올라 선몽대와 나란히 설 수는 있다.

우암은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뒤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 때가 1563년, 그가 26세 때다. 퇴계는 직접 선몽대 현판과 시를 써서 종손자에게 보냈다.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 흰 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우암은 백송에 돌아온 이후 농사 짓고 후학을 기르며 선몽대에서 노닐다가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왔다. 약포(藥圃) 정탁(鄭琢),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와 벼슬아치들이 선몽대에서 올라 시를 남겼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아버지와 함께 선몽대에 올라 200여 년 전 선대의 시를 발견하기도 했다. 선몽대에 걸려 있던 편액들은 지금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고 한다. 시판들은 멀리에 있으나 시는 눈앞에 있다. 김상헌이 퇴계의 시에 차운한다. ‘모래는 깨끗하고 냇물이 밝아서 맑기가 텅 빈 것 같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방향으로 간다. 서안동IC로 나가 예천방향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924번 지방도를 타고 호명면으로 가면 된다. 34번 국도에서 선몽대 이정표를 따르면 쉽다. 주차장은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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