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파수꾼 대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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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19   |  발행일 2018-04-19 제30면   |  수정 2018-04-19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기만·권모술수의‘촌장들’
그들 하수인인‘파수꾼들’
주민을 지키고 희망 주며
제 역할 하도록 다그쳐야
[여성칼럼] 파수꾼 대 파수꾼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있으려니 자꾸만 전화벨이 울린다. 휴대전화 행방을 찾을 때나 사용되던 집전화가 곧 있을 지방선거와 관련된 설문을 전하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방선거가 코앞이다. 후보들의 학벌이나 정치적 배경을 과시한 문구들로 도배가 되어 있는 선거홍보용 벽보를 무심히 지나쳤었는데, 심심할 새 없이 걸려오는 설문 전화가 선거철임을 일깨워준 셈이다.

함석헌 선생은 선거란 ‘덜 나쁜 놈’을 뽑는 일이라 하셨다. 필자는 흔쾌히 표를 줄 후보가 없다 싶어 설문을 심드렁한 대답으로 때웠지만, 덜 나쁜 놈이라도 뽑아 주민을 보살피고 지역현안을 해결할 동량(棟梁)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도록 지켜보는 것이 선거권자들이 할 일일 터다. 특히 세월호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민을 보호하고, 밝혀져야 할 진실과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도록 지방단체장과 의회의원들을 다그치고 또 지지해야 한다.

퇴학당한 16세 소년이 거리를 헤매다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눈떠가는 사흘간의 기록을 10대들의 비속어로 생생하게 묘사해 ‘청소년의 성서’라 불리는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가들의 기본책무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상류층의 속물 근성과 지식층의 위선에 염증을 느껴 공부를 게을리하다 퇴학당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인 형, 그리고 여동생 피비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뉴욕의 뒷골목을 떠돈다. 오염된 현실세계와 비열한 기성세대를 목격한 홀든은 순수한 어린아이들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넓은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옆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 될 꿈을 꾼다. 사실 ‘벼랑’에 직면해 있는 인물은 홀든 자신이며, 파수꾼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인물도 바로 홀든이다. 그래서 질식할 것 같은 뉴욕을 벗어나 한적한 숲으로 떠나려고 하지만, 여동생 피비의 믿음과 사랑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피비의 맑은 영혼이야말로 고독한 호밀밭의 파수꾼 콜필드를 지켜주는 파수꾼이었던 것이다. 결국 정치가란 국민과 주민을 보살피고 안전하게 지키고, 희망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도 선거철에 새겨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을 체제유지를 앞세워 촌장과 파수꾼들이 담합하여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거짓 경계로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가 지배하는 정치꾼의 행태를 풍자한 이 작품은 ‘양치기 소년과 늑대’라는 이솝우화를 비튼 것이다. 망루 위 파수꾼 ‘가’가 “이리떼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파수꾼 ‘나’는 양철북을 치고, 그 북소리에 마을은 이리떼의 급습을 피하려다 한바탕 난리를 치는 광경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우리도 안보를 명분 삼아 기만과 권모술수로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수많은 촌장과 그 하수인인 파수꾼을 목도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들여다봐야 할 인물은 파수꾼이다. 한 번도 망루에서 내려오지 않는 파수꾼 ‘가’, 한 번도 망루로 올라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선임 파수꾼 ‘나’, 망루로 올라가 이리떼는 어디에도 없고 흰 구름뿐이라는 진실을 알아낸 소년 파수꾼 ‘다’. 촌장은 그 진실을 감추려 소년을 회유한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촌장이 진실 편에 서도록 하는가, 촌장의 거짓 논리에 속는가, 아니면 무지하게 순응하고 살고 있는가?

안면기형으로 우주헬멧을 쓰고 다니던 소년 어기 풀먼이 편견과 따돌림을 견디고 초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원더’의 마지막 장면은 유권자와 후보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을 향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라”고 외치는 어기 폴먼에게 터쉬만 교장은 “선행이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위대함이란 강함에 있지 않고, 힘을 바르게 쓰는 데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은 그 힘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직접 본을 보입니다”라며 어기에게 상을 준다.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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