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할머니의 현금

  •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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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4   |  발행일 2018-02-24 제23면   |  수정 2018-02-24

‘기름집에서 난 불이 옮아 이미 불길은 가게를 휩싸고…. 거리는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화하고…. 베개 하나를 품에 안은 임이네가 불길 속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 “아아는 우짜고 베개만” (용이가) 베개를 뺏어 불길 속에 냅다 던진다. “베개! 베, 베개, 아아앗! 내 베개!” (임이네는) 불 속으로 달려간다. 용이는 비로소 그 베개 속에 큰돈이 들어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임이네는 월선이 벌어 놓은 돈을 훔쳐서 베개 속에 차곡차곡 넣어 둔다. 불이 나자 화염에 휩싸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자식은 안중에도 없고 돈이 들어 있는 베개를 건지는 데 눈이 뒤집혀 날뛴다.

농촌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집에 현금을 쌓아(?) 놓고 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식들이 용돈으로 쓰시라고 드린 돈, 한 달에 몇 만원씩 나오는 연금·수당, 곡식을 팔거나 수고비로 받은 돈 등이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한 푼도 안 쓰고 사는 생활이 체질화돼 모이는 돈이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그분들에게 돈은 물건으로 대체되는 교환수단이 아니라 모아두는 삶의 기둥이다. 돈이 줄어들 때 느끼는 상실감이 소비의 기쁨을 크게 압도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사용은 엄두도 못 낸다. 이렇게 작은 돈이 모여 제법 큰돈이 되기도 한다.

토지에서 임이네는 믿고 맡길 곳이 없어서 목돈을 베개에 숨겨놓고 있었다. 설사 오늘날 같은 금융기관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훔친 돈을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노인들도 돈을 금융기관에 맡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효성이 깃들어 있고, 땀이 배어 있는 각별한 돈이지만 노출을 꺼린다. 통장에 잔고가 많을 경우 기초연금 등 노인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2일자 영남일보 11면에 ‘화재현장에서 찾은 할머니의 패물’ 사진이 실렸다. 구미시의 한 농가주택에서 발생한 화재가 진압된 뒤, 집주인 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소방관들이 잿더미 속에서 찾아낸 현금과 패물이었다. 가지런히 접어서 묶어 둔 지폐가 일부는 불에 그을려 있었다.

농촌 노인들의 돈은 통장에 들어 있으면 보이스피싱의, 집에 모아 두면 좀도둑들의 표적이 된다. 귀하디 귀한 할머니의 현금이 안전하게 머물 곳은 없는 걸까? 이하수 중부지역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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