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앙갚음해야 할 슬픔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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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8   |  발행일 2018-02-08 제29면   |  수정 2018-02-08
[기고] 앙갚음해야 할 슬픔과 분노
송필경 (치과의사)

최근 저녁식사를 하다가 TV뉴스에서 서지현 검사의 ‘미투’ 방송을 보게 됐다. 서 검사는 북받치는 슬픔과 분노를 억눌렀지만,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것 같았다. 서 검사가 증언한 내용의 상황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내 눈에 선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다 보니 술자리에서 여성을 대하는 별의별 남자의 추태를 많이 보았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심지어 ‘어찌 저런 사람이 진보 운동을 하나’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땐 ‘나만은 그렇지 않으면 되겠지’ 하며 반면교사 삼고 그의 추태에 애써 눈을 감을 때도 있었다.

나는 딸이 하나 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 사회의 술문화 추태를 접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됐다. 그 딸이 성장해 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한국계 회사의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하루는 딸이 국제전화로 울먹이며 한국에서 온 주재원에게 성적 모욕에 가까운 갑질을 당하고 있다는 호소를 했다. 나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당장 달려가 그 녀석 사타구니를 걷어차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때마침 그 회사 고위층을 어찌어찌 소개받아 그분을 통해 갑질 직원을 오줌을 쌀 정도로 혼쭐냈다.

1954년 베트남이 프랑스를 상대로 베트남 최북단 오지에서 대결전을 벌였다. 당시 베트남은 정부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전쟁을 치렀다. 대부분의 베트남 젊은이들은 징집이 아니라 자원입대했다. 저 먼 남쪽 끝에서, 우리나라 백두대간보다 훨씬 길고 험한 수천 수백㎞ 길을, 그것도 맨발로 찾아와 자원입대한 젊은이도 상당했다.

처음 베트남 전쟁사를 공부할 때 ‘베트남인의 애국심이 그토록 깊었나’ 하고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 많은 젊은이들이 확고한 애국심으로만 전쟁에 참전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배국인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침공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마을을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약탈했다. 또 보이는 여자들을 겁탈했다. 젊은이들 눈앞에서 어머니가, 누이가, 딸이 그런 일을 당하자 베트남의 젊은이들 가슴에는 앙갚음해야 할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 찼다. 힘들고 지친 고난의 행군을 마다 않고 목숨과도 기꺼이 바꿀 그런 슬픔과 분노였다. 프랑스군의 막강한 무기와 화력도 그 앙갚음해야 할 슬픔과 분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68년 초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베트남 중부 지역 ‘미라이마을’에 미군이 들이닥쳤다. 미군은 3시간 남짓 동안 온 마을을 불태우고 죄 없는 베트남인 500여 명을 학살했다. 그중에 총을 든 건장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여자와 노인, 심지어 젖먹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잔학한 짓은 여성들을 대부분 강간하고, 임신한 여자마저 강간한 다음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때 저녁 무렵에 마을로 돌아온 한 베트남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짓을 자행했던 미국은 자신들이 그토록 비루하다고 깔본 베트남인들에게 결국 호되게 패전했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몹쓸 짓은 공분을 일으킨다. 당대 최고 여성 엘리트마저 천박한 희롱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준 서지현 검사, 나는 그 용기를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검사들이 동료 여성에게도 이럴진대, 하물며 술집에서는 어떤 천박한 작태를 벌일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런 추악한 작태를 벌이는 게 어디 검사뿐이겠는가.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지식인과 전문가그룹도 예외일 수 없다. 모든 국민이여, 앙갚음해야 할 분노를 가슴에 꼭 새기자. 그리하여, 이제는 딸만큼 또 소중한 나의 외손녀가 결코 이런 세상을 절대 만나서는 안 되게끔. 송필경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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