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 - 경남 ‘통영 오월’ 김현정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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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26   |  발행일 2018-01-26 제41면   |  수정 2018-01-26
통영살이 5년째…통영에만 있는 맛, 만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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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명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를 수석졸업한, 통영 도남동 레스토랑 ‘통영 오월’의 김현정 오너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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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진은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사리금귤샐러드, 라구딸리아딸레 파스타, 무·새싹·폰즈소스·레몬·금가루가 어우러진 굴 전채, 이탈리아식 농어소금구이.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20여분 달려 도남동의 한 주택가에 내렸다. 그녀가 마중을 나왔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김현정 셰프. 올해 43세. 그녀는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당신이 누군지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식이다. 자기 삶에 대한 일종의 ‘진지함’ 혹은 ‘자신감’으로 보였다.

그녀는 흰 페인트칠이 된 2층집을 레스토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리창에 ‘통영 오월’이란 문구가 말갛게 비친다. 나는 ‘오월’이 ‘5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오월의 영문자는 O’Wall. 통영으로 내려오기 전인 2008년 서울 부암동 주민센터 근처에서 차린 이탈리아 레스토랑 이름이 바로 ‘오월’이다. 당시 주변이 온통 성벽이었고 커다란 벽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음식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단다. 보증금 2천만원 월세 65만원으로 시작했다. 배우 유지태, 언론인 손석희 등 이름값 하는 이들이 슬쩍슬쩍 지나갔다. 힘을 얻어 오월만의 라인을 짰다. 그녀의 어머니가 시집 올 때 가져온 오목한 유리그릇에 담아냈다. 궁중떡볶이는 물론 치킨스테이크도 팔았다. ‘오월’로 이름값을 할 찰나, 그녀가 내심 우려했던 ‘젠트리피케이션’(구도심이 개발로 인해 임차료가 상승해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의 피해자가 된다. 5년 만에 거길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임차료 걱정 안해도 되는 적지를 찾아 전국을 많이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통영과 인연을 맺는다. 2014년 문을 연 통영국제음악당 내 이탈리아 레스토랑 ‘뜨라토리아 델 아르테’의 주방을 책임지게 된다. 통영만을 위한다기보다 국내외 명사들의 입맛을 지키는 곳이기도 했다.

틈만 나면 남해의 생선이 지천으로 깔리는 서호시장을 누볐다. 멍게와 굴은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싱싱했다. 통영 옆 고성 오일장에서도 자기만의 식재료를 찾았다. 요즘 전국의 이런저런 미식가가 통영을 올 때마다 그녀를 노크한다. 자기 색을 확고하게 가진 레스토랑이 아직 통영에선 한정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음악당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최근 다시 오월로 돌아왔다. 오월은 예약 전문. 라구딸리아딸레 파스타, 이탈리아식 농어소금구이, 무·새싹·폰즈소스·레몬·금가루가 어우러진 굴전채, 고사리금귤샐러드 등 가능하면 통영 해산물을 강조하려고 한다.

셰프의 운명이라는 걸 알기까지 적잖은 벽을 넘었다. 프랑스 명문 요리 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감각을 가장 많이 익혔다.

서울서 대학 졸업 후 베이커리점 취업
오너셰프 꿈키우며 美서 경험 이어 佛로
르꼬르동 블루 수석졸업…2003년 귀국
서울서 명성 쌓다 임차료 탓에 통영으로

국제음악당내 레스토랑 주방 책임지다
자신만의 색깔있는 요리 선뵈려고 개업
통영 해산물 강조한 파스타·전채 등 눈길


◆ 어머니는 스낵코너 운영

강화군 교동도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4세 때 서울로 간다. 엄마는 신세계백화점 옆 새로나백화점에서 경양식버전의 스낵코너를 운영했다.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가 잘 팔려 10여년 만에 자리를 잡는다. 자연스럽게 음식에 젖게 된다.

서울 배화여고를 나와 경희호텔전문경영대에 들어간다. 94학번. 당시엔 ‘유학파 오너셰프’란 용어조차 생소하던 때. 졸업하면 다들 호텔업계로 진출하기 바빴다.

대학시절엔 꿈보다는 일단 잘 놀았다. 오너셰프에 대한 예감 또한 없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셰프가 되었다. 운전면허증 취득한다고 해서 차를 잘 모는 게 아니듯, 학교의 요리와 현실의 요리는 뭔가 달랐다. 그걸 알아야만 했다. 그녀의 요리욕이 더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졸업 후 빵과 케이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위해 신사동 대한제과제빵학원에 들어간다. 틈만 나면 교보문고에 가서 원서로 된 요리서적을 뒤적거렸다. 처음에는 ‘설탕공예’로 불리는 ‘슈가크래프트(Sugarcraft)’에 꽂힌다. 이후 폼 잡고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올리브베이커리’에 취업했다. 직원이 20명이 넘었다. 거기서 막내였다. 한번도 단련해보지 못한 요리근육을 부단히 단련시켜야만 했다. 새벽같이 출근하면 40여 개의 행주부터 빨아서 대리와 부장님 자리에 갖다 놓았다. 빵을 만들 수 있게 생지도 잘 챙겨야만 했다. 신의 한 수, 그걸 잘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깨너머로 기술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 바닥의 생리.

성탄절 특수. 다른 사람은 웃음이지만 그녀에겐 ‘울음’이었다. 한 달 전부터 야근령이 떨어진다. 종일 500개의 달걀을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했다. 100㎏이 넘는 버터를 잘 섞이도록 치댔다. 당시 지하철 경복궁역 근처 서촌마을에 집이 있었지만 가장 바쁠 때는 사장이 단체로 잡아놓은 여관방에서 잤다. 8시간 토막잠을 자고나서 다시 빵집으로 출근. 그렇게 1년반 정도 시달렸다.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힘듦, 그게 곧 삶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 미국 텍사스로 간다

오너셰프를 하려면 이런저런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식당에서 1년 남짓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 시절을 너무 오래 보내도 너무 짧게 보내도 제대로 된 셰프가 되기 어렵다. 항상 타이밍이 중요했다. 큰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간다. 그냥 별 생각없이 갔다. 한 샌드위치숍에서 알바를 했다.

그때 ‘주문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미국 현지의 주문방식은 정말 정교했다. 우리나라는 ‘두루뭉수리 주문’ 일색이었다. 현지인들은 자기만의 식성대로 먹을 권리를 최대한 만끽하고 있었다. 사용해야 되는 향신료, 첨가해선 안되는 식재료를 칼같이 알려줬다. 채식주의자의 주문은 더 까다로웠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그걸 너무나 능숙하게 품었다. 주문시간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질 수밖에. 손님이 제한적으로 주문을 하니 셰프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뉴욕은 브런치로 베이글을 즐기는데 텍사스는 달랐다. 그들은 특이하게 아침부터 달달한 도넛을 즐긴다. 국내에서 줄서서 먹어야 했던 크리스피크림도넛도 텍사스에서 건너간 것이다.

지역색, 셰프는 그걸 정확하게 인지해야 된다. 미국에 있는 동안 교회 등에서 나만의 음식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제과제빵, 나중에는 메인요리, 그리고 디저트에 대한 궁금증까지 생겼다. 결국 김현정 버전의 제대로 된 서양 풀코스가 절실했다. 2001년 주저하지 않고 프랑스 명문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에 입성한다. 거긴 학비가 무척 셌다. 대신 장학금 제도가 좋았다. 프랑스는 타국 유학생한테도 우호적이다. 자국 학생과 같은 장학금 혜택을 준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한 학기 50~60명이 들어오는데 당시 한국 유학생은 13명. 교수들은 이론과 실전에 모두 능했다. 당시 일부 한국 학원 강사들의 이론이 약했다는 것도 현지에서 알게 됐다. 프랑스에서 제과제빵에서 요리로 전공을 바꾼다. 열심히 한 덕분에 수석졸업을 할 수 있었다. 다른 특전은 없다. 그냥 졸업장에 그 사실을 명기하는 수준.

2003년 귀국했다. 당시 강남 압구정동과 청담동이 가장 핫했다. 프랑스요리는 거의 죽어 있었다. 이탈리안이 대세였다. 일단 청담동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라볼파이아’로 들어갔다. 경력이 별로 없어서 2년간 다시 기본기를 더 다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는 나폴리식이 아닌 로마식 피자 전문점이었다. 로마식은 나폴리식보다 피가 더 얇다. 그녀가 귀국한 지 2년 정도 있다가 제대로 된 파인다이닝 시대가 서울에서도 열린다.

자기 가게를 차리고 싶어 광화문 서울지방경찰청 근처에서 ‘이탈리안 키친’을 연다. 파스타 전문점이다. 테이블은 5개, 10종류의 메뉴를 팔았다. 테이블 회전이 늦어 수익률이 저조했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구나 싶어 정리한다.

재차 일본 도쿄로 가서 3개월 벤치마킹을 하며 돌아다녔다. 정통파, 퓨전파 등 여러 스타일의 가게를 돌면서 실내 인테리어, 주문법, 매장관리 등을 익혔다. 역시 일본은 앞서나갔다. 미식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음식 선진국이었다. 셰프마다 자기만의 색깔이 또렷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스페셜하지 못했다. 그냥 제너럴한 수준. 그런데 언론이 너무 오버했다.

“이젠 우리도 자기만의 색깔을 구축한 오너셰프를 갖게 된 것 같다.”

한 20년 음식과 동고동락했다. 덕분에 그녀의 근육도 많이 단련됐다. 통영에 언제까지 머물지 모르겠단다. 하지만 한동안은 있을 것 같단다. 통영에서 재발진된 김현정의 ‘오월 창법’, 그 요리법이 바로 그녀의 삶이 될 때. 통영음식도 한 뼘 진화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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