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안동갈비 이야기- ‘혜동갈비’ 김정원 사장

  • 이춘호
  • |
  • 입력 2017-11-24   |  발행일 2017-11-24 제41면   |  수정 2020-10-07
체면 내려놓고 뜯는 그맛…소갈비와 마늘의 조합이 일품
20171124
1998년 안동역전에서 유행하던 안동갈비를 대구에 처음 퍼트린 안동갈비 김희곤 사장의 아내 김정원씨.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뒤를 이어 안동갈비 2막을 수성구 황금동에서 ‘혜동갈비’를 열었다. 김 사장 뒤편에 예전 안동갈비 내·외부 전경 사진이 보인다.
20171124
오래가는 마늘즙을 만들기 위해 쇠절구에 넣고 빻아 사용한다. 마늘갈비에 어울리는 소고깃국·된장찌개·겉절이·장아찌, 거기에 맞는 백김치를 수제 버전으로 만들고 있다.
20171124
재래된장을 시대 흐름에 맞게 조절하기 위해 개발한 견과류 들어간 된장. 유달리 검은 게 인상적이다.

국내 갈비구이문화는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큰 흐름을 형성한다. 북한은 평양, 남한은 서울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평양에서 갈비와 평양냉면이 1920년대부터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우’라는 육질이 우수한 한우 품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 당시 인구 2천만명이었던 한반도. 한우 수는 얼마나 될까. 무려 163만7천19두였다. 남한 갈비구이의 시작은 45년 수원 ‘화춘옥’에서 비롯된다. 79년 화춘옥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화춘옥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이목동 노송거리와 동수원거리에 갈비촌이 형성된다. 수원갈비는 갈비 폭이 10~13㎝.

이후 경기도 포천 이동갈비가 갈비특수를 선도한다. 전성기는 86아시안·88서울올림픽게임 때. 그러나 이른바 ‘본드 갈비’ 보도 여파 등 악재가 겹쳐 이동갈비촌은 점차 시들해진다. 이동갈비는 양적인 푸짐함을 추구해 갈비를 반으로 잘라 2~3㎝ 크기로 짧게 토막을 내고 간장양념에 재는 형태였다.

그새 서울 도심에 각종 갈비촌이 확산된다. 81년 11월 강남 신사동에 삼원가든이 생기고 나서부터 늘봄, 서라벌, 초성공원, 한강장, 강남장 등 15개소의 대형 가든형 갈빗집이 들어섰다.

이 흐름은 대구와도 맞물려 돌아간다. 북구 고성동 ‘대창가든’, 동구 신암동 ‘신성가든’은 70년대 구이시대를 선도한다. 서구에선 ‘한국가든’, 이어 남구 앞산네거리 근처에 ‘앞산가든’과 ‘가야동산’이 맹위를 떨친다. 이때 중구 반월당 근처에서 출발했던 ‘제주가든’이 범어네거리 쪽으로 옮겨 기세등등하게 성장한다.

서울 갈빗집에선 갈비를 한쪽으로만 뜨는 ‘외갈비’를 선호했다. 다이아몬드 칼집도 이때부터 넣기 시작한 것. 반면 강북지역 식당에서는 갈비를 양쪽으로 포 뜨는 ‘양갈비’를 내밀었다. 갈비구이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갈비가 득세를 한다. 90년대 초 수입 LA갈비가 등장한다. 갈비구이를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한우 갈비는 제1~5번 갈비를 ‘본갈비’라 한다. 갈비 근육이 살코기, 지방 등 세 겹으로 층을 이루는 것이 특징. 마블링이 좋아 생갈비구이에 이용해도 무난하나 등급이 낮은 것은 통갈비로 썰어 찜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제6~8번 갈비는 ‘꽃갈비’. 양념하지 않고 칼집을 넣은 생갈비구이에 좋다. 제9~13번 갈비는 ‘참갈비’. 본갈비에 비해 섬유질과 근막이 많고 거친 편이다. 꽃등심과 양지의 중간 정도 맛이 난다. 갈비뼈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갈비탕에 좋다. 서울에서는 흔히 꽃갈비만을 구이용으로 사용하는데 영남지역은 1~13번을 통째로 사용한다.

대구 소갈비계 대부는 1961년 ‘진갈비’
‘국일소갈비’도 갈비 구이문화 산파역
98년 6월 범어동 KBS 골목 ‘안동갈비’
‘대구 입성한 첫 안동갈비집’ 역사 시작

실직 후 고전하던 夫 김희곤·婦 김정원
연애 때 들른 안동 ‘서울갈비’서 돌파구
‘서울 갈비요리에 경상도 마늘’ 비법 전수
직접 찧은 마늘 등 입맛 공략 성공 장사진
2008년 남편 여읜 슬픔 딛고 홀로 재출발


◆지역의 갈비구이문화

경남 함양도 갈비를 알아준다. 여긴 갈비찜과 갈비탕을 동시에 성공시켰다. 또한 부산 해운대도 갈비문화가 깊다. 64년 영업을 시작한 ‘해운대 소문난 암소갈비집’이 그 주인공. 해운대 갈비는 둥그런 불고기판을 사용해 간장양념에 잰 갈비를 굽고 양념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특징이 있다.

서울에선 90년대 등심문화가 정착된다. 64년 문을 연 서울 왕십리 ‘대도식당’은 ‘서울발 등심구이 특수의 진원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갈비구이에서 등심구이로 넘어오는 연결고리였다.

대구의 소고기 관련 음식도 패턴을 갖고 발전해나간다. 처음에는 육개장, 따로국밥 등이 축이었다. 60~80년대, 대구 호경기에 부응한 게 불고기와 갈비다. 불고기는 계산동 ‘땅집’, 갈비는 대신동 갈비골목의 첫단추를 만든 ‘진갈비’가 대표격. 이 두 음식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 게 ‘동인동찜갈비’.

92년 수성구 만촌동에 가공할 만한 숯불구이집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비원’이다. 김옥순 사장은 그걸 인척에게 물려주고 99년 갈비 전문 한정식인 ‘안압정’을 연다. 안압정과 쌍벽을 이룬 갈빗집 중 하나가 수성구 ‘만포장가든’. 박영희 사장은 81년 대구에서 주물럭등심 붐을 주도한 ‘한국가든’의 오너였다. 안압정은 등심 위주의 고기문화를 갈빗살 시대로 전환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또한 섬유회관 바로 옆 ‘국일소갈비’도 갈비문화의 산파역. 이들보다 더 앞선 지역 갈비계의 대부가 있다. 61년 대신네거리 갈비골목에서 ‘진갈비’를 오픈한 진홍렬씨. 그가 대구에서 가장 먼저 갈비 절단용 전동톱을 서울 마장동에서 사갖고 왔다.

◆안동갈비 대구 유입사

98년 6월. 대구 갈비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신축된 KBS대구방송총국 골목에 ‘안동갈비’가 오픈한 것이다. 밀양 출신의 김희곤과 대구 출신의 김정원. 부부는 남모르는 혹독한 시련을 품고 가게를 오픈했다.

외국계 회사 영업사원이었던 남편은 세상 물정을 몰라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파산하게 된다. 대전에서의 신혼살림은 한순간 물거품이 된다. 돈이 만든 절벽 앞에 선 부부는 절규했다. 툭하면 사채업자가 찾아왔다. 아내는 도시의 꿈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자고 고집했다. 남편은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한때 대전발 생선구이 프랜차이즈인 오오구이를 대구에 차려보려 했다. 결국 그 사업까지 물 건너가버렸다. 남편은 트럭을 구입했다. 적당한 길목에 세워놓고 종일 과일을 팔았다.

역시 아내의 육감은 남편보다 한수 위. 뜬금없이 연애시절 안동역에서 먹었던 안동갈비가 생각났다. 안동으로 갔다. 56년 전 안동역전에서 출발한 ‘서울갈비’. 그 식당주는 서울에서 내려온 서원님 초대 사장. 현재 89세인 서씨 할매는 서울 갈비요리에 경상도의 마늘요리를 합쳤다. 안동 토박이가 아니라 서울댁이 새로운 버전의 안동갈비를 탄생시킨 것이다. 서울갈비 뒤에 ‘거창갈비’가 가세했다. 두 식당이 역전에서 안동갈비를 전국에 알린다. 현재 운흥동 안동역전은 ‘갈비골목’이 됐다. 무려 15개 업소가 몰려있다. 3번 이사한 서울갈비는 여전히 역전권에서 ‘구서울갈비’로 장사하고 있다. 딸 전숙자씨가 대를 이었다.

부부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연애시절 그 갈빗집에 들어갔다. 서씨 할매는 부부가 나누는 심상치 않은 대화를 다 엿듣게 된다. 아내가 자기 딸처럼 보여 처연하기만 했다. 갈빗집 할 자세가 돼 있다 싶었던지 부부에게 사례도 받지 않고 자기 음식 노하우를 다 전수해준다. 동화 같은 미담이 아닐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이 딴 맘을 먹기 전에 일을 저질러 버렸다. 지금과 달리 방송국 앞길은 죽어 있었다. 대신 안심약국 옆 70번 골목도로는 상대적으로 활성화됐다. 권리금도 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갈비에 살포시 내려앉은 마늘향, 그게 직화숯불에 구워질 때 피어오르는 훈향은 기존 양념갈비와 달랐다. 기존 등심·안심구이와 확연히 구별됐다. 정성이 최고다 싶어 석쇠도 직접 씻었다. 마늘즙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쇠절구에 넣고 직접 찧었다. 저급한 마늘은 쉬 말라버려 사용할 수가 없었다. 부추겉절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음식궁합이 안 맞아 양파로 교체했다.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 새벽 1시에 문을 닫았다. 쉬는 날도 없었다. 1주일도 안 돼 손님들로 장사진을 쳤다. 맛이 있으면 제발로 찾아온다는 걸 알았다. 오픈 때 1인분 6천원, 그게 1만5천원이 될 때까지 빚을 갚아나갔다. 그렇게 19년 정도 휴일없는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아내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다. 남편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2008년 8월, 한숨을 억누르고 아내는 남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돌아보니 무조건 일만 한 것 같았다. 안동갈비란 상호가 얼마나 마케팅파워가 부족한가도 알았다. 지명이 들어간 상호는 특허가 나질 않았다. 자연 같은 이름의 가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남구 봉덕동 봉덕맛길에서도 안동갈비가 줄을 잇는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할 것 같았다. 정든 식당을 뒤로하고 수성구 범어동에 직영점 격인 ‘정원갈비’를 열었다. 그걸 다른 이에게 넘기고 2015년 8월 수성구 황금네거리 ‘한국관’ 맞은편 이면 골목에서 새로운 안동갈비의 역사를 시작했다. 상호도 바꿨다. ‘혜동갈비’다. 굳이 ‘대구에 입성한 첫 안동갈비집’이란 사실도 아무한테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은 좋은 고기를 태우지 않고 제때 먹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귀한 옷에 스며든 고기냄새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섬유탈취제를 입구에 비치해둔다.

젊은 단골을 겨냥, 견과류가 들어간 검정 된장도 낸다. 속을 달래주는 전채용 소고깃국, 그리고 식후 느끼해진 입맛을 다져주는 된장찌개, 참나물·치커리·파를 섞어 겉절이를 만들고 케일·새송이·고추장아찌도 올린다. 백김치가 중요하다. 아삭한 식감, 동치미국물 같은 국물맛을 유지해야 된다. 갈비 관리도 어렵다. 문제있는 고기는 절대 올리지 않는다. 팔도마다 자기 색깔이 있듯 갈빗살도 장만해 보면 늑간살, 살치살, 안창살, 치마살, 골살 등 저마다 맛이 다르다. 그걸 손님 식성에 맞게 세팅해줄 줄 알아야 갈빗집 주인이랄 수 있는데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요즘 큰 고민이 있다. 다들 너무 연한 고기만 찾는다. 안동갈비 본연의 맛은 조금 찔깃한 황소갈비에 있다. 곧 ‘황소갈비시대’가 올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먹어보시라. 마늘갈비 130g 1만7천원. 영업시간 : 오전 11시~밤 11시.연중 무휴. 수성구 청수로 20길 9-34. (053)752-7002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