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세금도둑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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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3   |  발행일 2017-11-23 제31면   |  수정 2017-11-23

10년 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지발위)가 주관하는 지역 언론사 공동 취재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주제는 정부·지자체의 예산낭비 실태와 방지대책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를 포함한 취재단은 예산 감시 시스템이 잘 갖춰진 선진국 사례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을 일주일간 방문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취재했던 내용보다 더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우리 일행을 인솔했던 지발위 관계자 A씨의 남달랐던 청렴성(?)이 그것이다. 취재 내용이 예산과 관련된 터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A씨는 모든 경비 내역을 10원 단위까지 철두철미하게 정산했다. 심지어 그는 일행이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는데, 그게 기념사진이 아니라 지출 증빙 자료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나랏돈을 자기 돈보다 엄격하게 쓰는 A씨의 행동은 너무나 모범적이어서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지발위가 여기저기서 간섭을 많이 받는 힘없는 기관이다보니 더욱 몸조심했을 듯싶다. 판도라의 상자에 감춰져 있다가 요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특수활동비의 검은 실체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특수활동비를 제 쌈짓돈처럼 마구 쓴 곳은 청와대나 국정원같은 모두 힘있는 기관들이지 않은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국정원은 쓸데없는 일하느라 많이 바빴던 것 같다. 좌파 척결을 한답시고 블랙리스트 만들고 댓글 달고 사찰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권력 실세들에게 돈까지 갖다 바쳤으니 가히 정권의 충견이었던 셈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국정원의 특수활동비 전용·횡령 사례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국정원이 한 해 1조원이나 되는 예산을 얼마만큼 제대로 쓰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특수활동비 문제는 비단 국정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기밀 활동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정부 부처 기관장과 국회의원 등도 특수활동비를 쌈짓돈처럼 쓰고 있다. 그들은 이 돈을 직원 회식비, 격려비 따위로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주로 자신의 생활비나 유흥비로 사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수활동비 빼먹기는 예산 낭비 정도가 아니라 예산 도둑질이나 다름 없다. 권력을 앞세워 국민 혈세로 사욕을 채우는 세금도둑들이 너무 많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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