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여자답게’ 달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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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3   |  발행일 2017-11-23 제30면   |  수정 2017-11-23
세계적인 옥스퍼드대학도
남성 he나 여성 she 대신
중성적인 ze 사용을 권장
여자답게의 구속 벗어나
그저 자신답게 살면 될 것
[여성칼럼] ‘여자답게’ 달린다는 것은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모든 명사에 성별 구분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는 성별에 따라 단어가 바뀌지 않지만 독일어는 명사의 성별에 따라 앞에 붙는 관사가 달라지기 때문에 단어별로 남성형/여성형/중성형을 모두 외어야 한다. 여자/남자, 암탉/수탉 등 구분이 쉽게 되는 단어도 있지만 책상은 남성명사, 문은 여성명사이고, 연필은 남성명사, 분필은 여성명사라는데 이를 분류하는 뚜렷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그저 새 단어를 만날 때마다 암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개인적인 경험인지 모르겠지만 성별이 없는 사물이라도 그 사물을 표현하는 단어가 남성명사인지, 여성명사인지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스포츠는 독일어로 남성명사 ‘der Sport’인데, 강하고 역동적인 스포츠의 느낌이 확 살아나면서 스포츠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에 남성명사로 분류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단어가 지닌 성별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성별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스포츠가 여성명사였다면 좀 더 부드럽고 활기찬 여성적 이미지를 떠올렸을까?

작년 이맘때쯤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인 영국 옥스퍼드대학교가 ‘he(그)’나 ‘she(그녀)’ 대신 중성적 표현인 ‘ze’를 쓰도록 권장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교내 남녀차별을 방지하고 성별에 따른 선입견을 만들지 않기 위한 목적과 함께 성적소수자를 배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규정에 따라 학생회관 화장실과 같은 공공시설에 성(性) 중립적인 단어 ‘ze’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 10년마다 새로운 사전을 펴내는 스웨덴 학술원도 2015년 3월, 남자(han)도 여자(hon)도 아닌 대명사 ‘hen’을 사전에 등재해 화제가 됐다. ‘hen’은 스웨덴에서 1960년대 처음 만들어졌지만 널리 쓰이지 못하다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면서 반세기 만에 드디어 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매우 크다. 2015년 미국 슈퍼볼 경기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광고는 글로벌 기업인 P&G의 캠페인 광고였다. 워낙 입소문을 많이 탄 광고라 유튜브(www.youtube.com) 검색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첫 장면, 카메라 앞에 선 여성에게 카메라 쪽 여성이 주문한다. “여자답게 뛰어보세요.” 백인 여성, 흑인 여성, 성인 남성, 소년이 차례로 등장해 ‘여자답게’ 뛰는 모습을 시연한다. 인종,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이들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손은 아래위가 아니라 가슴 위에서 좌우로 돌아가고 다리는 바깥쪽으로 향하게 해서 살랑살랑 뛰어가는 모습이다. 심지어 뛰다가 머리가 흐트러진 한 여성은 긴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오! 내 머리”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단지 ‘여자답게’라는 말 한마디가 마법 같은 주문이 되어 달리는 모습도, 싸우는 모습도, 공을 던지는 모습도 그야말로 ‘여자답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 이전 여자아이들에게 똑같이 ‘여자답게’ 뛰어보라고 주문하니까 하나같이 열심히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녀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에게 물었다. “‘여자답게’ 달려보라고 했을 때 어떤 의미로 들렸나요?” 그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최대한 빨리 달리는 거요.”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크는 동안 “넌 여자애가 칠칠치 못하게” “여자가 밤늦게 다니면 쓰나” “여자가 아침부터 재수 없게” 등등. 여자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생기고, 행동의 제약을 받은 경험 말이다. 지금처럼 ‘여자답게’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면 여자들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다.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그 범주 안에 갇혀서 정해진 선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아예 포기하게 된다. ‘여자답게’가 아니라 그저 나답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 되는 건데.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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