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학의 전통문화이야기] 모국어의 바다, ‘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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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2   |  발행일 2017-11-22 제30면   |  수정 2017-11-22
[손영학의 전통문화이야기] 모국어의 바다, ‘혼불’
대구시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

대중문화 속에 전통이 녹아 있으면 반갑고 소중하다. ‘혼불’(최명희), ‘토지’(박경리), ‘장길산’(황석영), ‘객주’(김주영), ‘태백산맥’(조정래), ‘임꺽정’(홍명희) 등의 대하소설과 장례문화의 민낯을 보여준 ‘학생부군신위’(박철수 감독), 이청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축제’(임권택 감독)가 그러하다. TV채널만 돌리면 즐길 거리가 차고 넘치는 세상에 ‘혼불’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발행한 ‘숨어사는 외톨박이’ 시리즈와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시리즈와 더불어 가장 아끼는 책 중 하나다.

‘혼불’은 일제강점기 전북 남원의 매안 마을과 고리배미 거멍굴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매안이씨 가문의 삼대를 이루는 청암 부인과 그 아들 이기채 부부, 손자 이강모와 허효원 부부 등이 주 인물이다. 소설은 1980년 봄,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되어 17년이 흐른 1996년에야 “그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로 완결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단어 하나, 한 문장을 공들여 읽은 적이 언제였던가.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글자 하나하나가 내 피와 살과 같다”는 작가의 말이 거룩하다.

소설 속엔 관혼상제, 종부의 가문 의식, 풍수지리, 음식문화, 세시풍속, 설화, 풍부한 방언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민요나 시조, 한시와 내방가사, 무가와 설화, 판소리, 편지를 포함한 실용문 등이 재구성되어 서사의 호흡을 조절하고 있다. 그 어느 민족지에 기술된 것보다 더 정확하고 다채롭기에 민속학자들에게도 바이블로 칭송된다. “대관절 혼불은 읽어봤당가?” 소설 속 방언을 흉내 내어 지인들에게 기습적으로 묻기도 했다.

‘혼불’에 깃든 불멸의 정신을 기리는 문학관이 두 군데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남원시 사매면 노동마을엔 ‘혼불문학관’이, 작가의 고향인 전주에 ‘최명희문학관’이 있다. 5년 전 가을, 혼불문학관에서 작가의 만년필과 잉크병과 원고지에 쓴 정갈한 육필 원고를 보며 참 울컥해졌다. “어찌하지 못할 불길에 사로잡혀” 쓴 혼불.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작가가 남긴 글귀에, 글쓰기의 엄중함과 절절함에 숙연해지고 말았다.

이름이 드날리면 재빨리 스토리텔링과 문화 콘텐츠라는 옷을 입힌다. ‘혼불’도 마찬가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종가댁 효원이 서도역을 통해 마을까지 시집오는 ‘신행길 재현’ ‘혼불만민낭독회’와 ‘혼불 속 명문장 쓰기’ ‘혼불 완독 프로젝트’ ‘혼불문학제’ ‘혼불학술제’ ‘문학기행’ ‘손글씨 공모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1998년 51세에 육신이라는 집을 벗어던지고 저세상으로 떠난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살아있는 그 무엇이 ‘혼불’임을 보여주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오래오래 나의 하는 일을 지켜 보았으면 좋겠다”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우리들의 가슴에 ‘혼불’이 오래 살아 숨쉬길 바란다. 대구시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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