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블랙리스트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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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2   |  발행일 2017-09-22 제23면   |  수정 2017-09-22

살다보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런저런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기 마련이다. 당선, 합격, 승진, 복권당첨 같은 행운의 명단에만 늘 포함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에선 정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가 작성한 요주의 인물 명단, 즉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게 가장 큰 불행일 것이다. 특히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더구나 블랙리스트라는 올가미를 씌운 게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이라면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블랙리스트는 어감부터 사람을 섬뜩하게 한다. 블랙(black)이란 말 자체가 그렇다. 요즘에는 점잖거나 세련된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본디부터 죽음, 질병, 불행, 흉계 따위를 상징하는 단어 아닌가. 심지어 블랙은 살인의 의미까지 지니는데, 살생부를 뜻하는 블랙리스트가 대표적인 경우다. 17세기 영국 국왕이었던 찰스 2세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작성한 처단 대상자 명부가 블랙리스트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피비린내 나는 살생부는 수두룩했는데, 지금 우리나라도 이 문제로 온통 시끄럽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박근혜정부 이전에 이명박정부 때부터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있었지만, 최근 드러난 실체는 상상 이상이다. 무엇보다 소설가, 배우, 방송인, 가수 등 82명을 좌파로 분류해 블랙리스트를 만든 게 국정원이었다니 어이가 없다. 더구나 국정원은 세무조사를 비롯한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해당 문화예술인의 밥줄을 끊어놓다시피 했다. 이뿐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오른 유명 남녀 연예인의 알몸 사진을 합성해 인터넷에 퍼뜨리는 치졸한 짓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피해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싶다.

MB정부 블랙리스트에 오른 소설가 이외수는 며칠 전 자신의 SNS를 통해 처참한 심경을 밝혔다. “이명박근혜정부의 잔인하고 야비한 탄압 때문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며 “오뉴월 마른벼락을 죽을 힘을 다해 쫓아가서 맞아 뒈질 놈들!”이라고 일갈했는데 충분히 공감이 간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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