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1] 식량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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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1   |  발행일 2017-09-21 제29면   |  수정 2017-09-21
美軍政 주먹구구식 쌀수급…굶주림은 분노로 변해
20170921
이틀이나 사흘을 굶은 부민들이 쌀자루를 들고 경북도청으로 몰려가 시급히 쌀을 달라고 호소를 했다. <영남일보 1946년 3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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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을 굶었소. 시급히 쌀을 주오!”

‘이날 쌀자루를 들고 도청으로 몰려온 군중들 중에 여러 사람이 농상부장 헐쓰 소좌와 만나고 대략 다음과 같이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를 하였다. ~ 20일 동안 기다려달라고 하나 7일 동안만 굶으면 죽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온 사람 중 혹은 하루 혹은 2, 3일 굶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죽지 않으려고 쌀을 팔으려 온 것뿐입니다. ~’(영남일보 1946년 3월12일자)

쌀자루를 들고 도청으로 몰려온 이유는 단 하나. 쌀을 구하기 위해서다.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삼순구식’으로 연명할 정도의 배급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쌀을 달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우성쳤다. “사흘 동안을 굴멋소(굶었소). 시급히 쌀을 주오”라는 하소연 그대로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쌀 자루 반입은 막히고 배급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모리배가 설치는 엉망진창의 쌀시장이 만들어졌다.

쌀 수급이 이처럼 뒤엉키게 된 이유는 뭘까. 미군정 당국의 주먹구구식 대책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애초 경북도는 광복 석 달 뒤인 11월만 하더라도 쌀 수급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낙관했다. 쌀 수확량이 평년과 같은 260만섬이 될 것으로 어림짐작했다. 또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을 1섬으로 잡아 도민 250만명(해외 귀환동포 포함)이 먹어도 10만섬 정도가 남을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단 며칠 만에 여지없이 빗나갔다.


군정, 최고가격제 시행 선전
시민들 반값 학수고대했지만
되레 쌀값 급등하고 자취 감춰
혼돈기 모리배 매점매석 한몫



‘~ 쌀의 최고판매가격을 결정 공포하고 금년 1월1일부터 이것을 실시한다는 것을 신문과 라디오로 선전해 왔다. ~ 쌀값을 상시 시가의 반값으로 인하한다는 것은 고물가에 쪼들리고 있는 대중들에게 구세주의 복음과 같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소비대중은 커다란 기대와 안심을 가지고 1월1일을 고대해 왔다. 그러던 것이 1월1일을 당하고 보니 쌀이란 형태까지 완전히 감추어 버리지 않았는가. ~’(영남일보 1946년 1월5일자)

미군정은 1946년 1월1일부터 시장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통제하는 최고가격제를 실시했다. 그렇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가격은 크게 오르고 쌀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신문은 미군정의 무능력과 무성의를 질타했다. 혼돈기 원활한 쌀 수급과 적정한 가격 대책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생산자와 모리배의 매점매석도 한몫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밀무역도 문제였다. 예컨대 우리 땅에 들어온 밀감은 1개 7원(당시 고무신 한 켤레 70원)으로 고가에 팔렸다. 반대로 조선 쌀은 일본에서 10배 가까이 비싸게 매매되기도 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대구부 내의 식량난은 심각했다. 쌀값 폭등도 폭등이지만 쌀 한 톨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부민들은 한 되의 쌀이라도 배급받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게 급선무였다. ‘광복의 선물은 기근’이란 당시의 이야기는 헛말이 아니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굶주림은 울분과 분노로 째깍째깍 바뀌고 있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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