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12] 지방교원의 가계비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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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0   |  발행일 2017-07-20 제29면   |  수정 2017-09-05
“쌀·생활필수품 배급제 대상, 농촌 봉급생활자 제외 유감” (1946년 2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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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한 지방교원이 적자에 허덕이는 한달 동안의 가계비를 신문에 기고했다. (영남일보 1946년 2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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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대신 쌀을 다오.’

월급쟁이의 하소연이다. 8·15는 독립과 자유라는 기쁨을 안겼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경제적인 고통을 몰고 왔다. 특히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고는 월급쟁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쌀값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美)군정의 식량 수급정책 실패와 이를 틈탄 모리꾼들의 매점매석은 1945년의 풍년을 무색하게 했다.


식구 8명 생활비 1441원
매달 661원 적자 허덕여
아이들 의복·신발 거지꼴
독립 이후 물가폭등 신음



‘~수량을 위시하여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도로 환원하다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한 가지 원하는 것은 도시인에게만 실시치 말고 농촌에 사는 비농가의 봉급생활자도 동일시하여 실시하라는 것이다. 도시인과 위정당국에서 생각할 때 농촌에는 없다없다 하여도 무엇이라도 식량이 풍족하고 살기가 도시보다 낫다고 추단하여 농촌거주의 비농가와 봉급생활자들의 고민을 이해치 못하는 것 같음은 유감천만이라~.’(영남일보 1946년 2월18일자)

경북에 사는 교원 권태익이 한달 동안의 가계비를 신문에 낱낱이 고백했다. 물가고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큰 봉급생활자들은 생활물자의 배급제 실시를 원했다. 4월에는 일제강점기보다 줄어든 한홉으로 식량 배급제가 결정됐다. 그러자 400원 안팎을 오르내리던 쌀 한말의 가격은 한때 300원대 아래로 떨어졌다. 금지됐던 쌀의 지역 내 반입이 일부 허가된 영향도 있었다. 당시 쌀 한말의 공정가격이 38원이었다는 기록에 비춰보면 쌀값 폭등에 입이 쫙 벌어질 정도다. 기사 첫머리의 ‘수량(隨量)’은 알맞게 맞춰 배급하는 식량(쌀)을 뜻한다.

‘~양말, 신, 의류포목, 여자 화장품 등을 산다고 하면 최소한도로 1천800원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11월 달 수입은 780원이니 마이나스 661. 20이다. ~물가고에 신음케 되어 근일 생활 상태야 꼴불견이며 아해들의 의복과 신발을 보면 거지소리를 못 면하겠으며 나에론 옷과 내복에 헌옷으로 고치어 입힌 옷까지도 다 떨어져가게 되었다. 대구사범에 다니는 자식도 불가불 퇴학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이르렀다.~’(영남일보 1946년 2월18일자)

그가 공개한 11월 한 달치 가계부를 보면 식구 8명(대인 5, 소인 3)이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사는데 드는 비용이 1천441원이다. 하지만 수입은 780원에 그쳐 661원이나 적자를 본 것이다. 옷이나 여자화장품 등을 샀다면 한 달에 최소 1천800원은 들었을 것이다. 그는 봉급생활 16년간 일본의 몹쓸 침략전쟁에 희생됐다가 살아왔는데 또다시 물가고에 신음케 됐다는 한탄을 덧붙인다.

게다가 자식에 대한 애틋함이 더하다. 아이들의 의복과 신발을 보면 거지에 가깝다고 안타까워한다. 교육비도 만만찮다. 대구사범에 다니는 자식의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게 해야 할 형편이란다. 아이들 밑에 드는 한 달 교육비가 280원으로 쌀을 빼면 그야말로 지출비중이 가장 높다. 부모의 허리는 그 때도 휘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박사

박진관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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