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잠시나마 병이 없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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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9   |  발행일 2017-07-19 제30면   |  수정 2017-09-05
“병없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
피의자 신문조서 한 대목에
마약사범 편견은 사라지고
눈물 가득한 그의 삶의 얘기
변론 준비 서면에 담았다
20170719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아무리 범죄자라도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거나 연민이 느껴지는 구석이 한 군데쯤은 있기 마련이다.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파렴치한을 제외하고는 대개 경제적 혹은 정서적으로 삶의 절벽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연을 듣다 보면 최소한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나오게 된다. 변론의 힘이 법적 지식보다는 그런 공감에서 나올 때가 많다. 그런데 정말 정이 안 가는 사건 유형이 있으니, 내게는 마약 사건이 그랬다.

마약에 취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 가족·직장·일상 그 모든 것을 반복적으로 위험에 빠뜨린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약 사건에 특유한 ‘공적(功績)’이라고 하는 수사협조 확인서를 받기 위해 온갖 수를 쓰는 문화도 마약 사건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마약이 은밀하게 거래되기 때문에 수사기관은 마약범의 도움을 받아 다른 마약범을 잡는데, ‘공적’ 이면의 배신과 뒤통수치기로 가득 찬 세계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지가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했다.

마약 사건은 그래서 오히려 편한 사건이었다. 마음이 쓰이지 않으니 변론에서 피고인의 변명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스물여덟, 그의 사건도 처음에는 그렇게 편한 사건 같아 보였다. 1년 반 전에 처음으로 마약 투약으로 재판받고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았는데, 집행유예 기간 중 또 마약을 투약해 구속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고, 앞의 집행유예는 취소되었다.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자라는 거 외에는 평범한 마약 사건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구치소 변호인 접견실로 나온 그는 예의가 무척 발랐다. 나는 마약 항소심사건에서는 ‘공적’이 없다면 거의 항소기각 판결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저는 혼자 투약한 거라 수사 협조할 것도 없는데, 그럼 선고형을 낮출 수가 없겠네요?”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이다. ‘예의는 바르지만 이 사람도 자기 연민에 빠져 있군. 하여간 마약범들이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데 마침 피의자 신문조서의 한 문답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문 “필로폰을 투약하면 건강한 사람도 몸이 나빠지는데, 피의자의 병도 더 악화되는 것 아닌가요.” 답 “맞습니다. 그렇지만 잠시나마 병이 없는 사람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무성 흑백영화가 디지털 사운드 HD 영화로 바뀐 순간처럼 형식적으로만 들어주던 마약범의 이야기가 내 마음의 문을 덜컹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병에 걸렸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군에 가기 몇 달 전에 아르바이트하던 직장에서 술을 마시고 남자들끼리만 가는 ‘2차’를 갔고, 그도 별 생각 없이 따라갔다고 했다. 수사기록에 첨부된 5년 전 진료기록사본에는 ‘HIV+ : 3개월 전 commercial sex history+, 이반 아님’이라고 적혀 있었다.(이반은 동성연애자를 뜻한다)

“군에서 피 검사를 받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바로 제대 조치를 당하고 많이 방황했어요. 아르바이트로 한달에 100만~150만원 정도 버는데, 약값에만 20만~30만원씩 들어가서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필로폰을 하면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 한번에 40만원씩 주고 구했어요. 그때는 절망뿐이었고, 근심 걱정 없는 그 순간만이 삶의 유일한 의미였어요. 구속된 후 구치소에 면회 오는 엄마와 여동생을 보면서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걸 깨달았습니다. 저만 힘든 게 아닌데 그동안 저만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살고 싶은 의지가 생겼습니다. 밖에 나가면 병 치료도 제대로 받고 필로폰도 끊겠습니다. 저를 찾아와 주시고 친절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마약범이라고 삶의 벼랑이 없었겠느냐고, 국선변호인이 그렇게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도 되느냐고, 그가 나를 질타하는 것 같았다. 변론 준비 서면에 눈물 가득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담았다. 마약범에 대한 항소기각 판결에 처음으로 가슴이 쓰라렸다.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이창호 leec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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