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5> 마평에 깃들다 - 덕양재, 부강서당 그리고 쌍체정과 용간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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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9   |  발행일 2017-07-19 제13면   |  수정 2021-06-21 16:59
士禍 피해 찾아온 땅… 빛이 가득한 집이 담담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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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에 자리한 덕양재 전경. 덕양재는 달성서씨 청송 입향조인 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의 손자 서봉(徐琫)을 모신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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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동면 지리에 위치한 용간정의 모습. 용간정은 1985년에 건축된 젊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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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쌍체정 전경. ‘쌍체’란 한 쌍의 산앵두나무라는 뜻으로, 활짝 핀 산앵두나무 꽃은 형제의 우애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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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부강서당의 모습. 조선 말기 유생이자 의병이었던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이 사림과 함께 지었다고 전해진다.

 

 

꽃밭등(花田嶝)을 타고 쓰윽 미끄러져 내려간다. 착지한 곳은 너르고 평평한 들. 용전천이 들의 남쪽을 온전히 적시며 흐르고 나지막한 산들이 편안한 호흡으로 감싸 안은 땅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20리를 달리면 주왕산이다. 주왕이 주왕산에 몸을 숨겼던 전설의 시대에 그를 잡으러 온 마사성은 이 들에 말을 매고 진격의 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들은 마뜰 또는 마평(馬坪)이라 불렸다. 지금 마평은 상평리(上坪里)와 지리(池里)로 나뉘어 있지만 모두 저 들에 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달성서씨 청송 입향조 모신 덕양재
상평리 양지바른 들에 곧게 서있어

마평 四義士 서효원이 지은 부강서당
한때 병신년 의병 위패 보관하던 곳


형제간의 우애 깃들어 있는 쌍체정
망동하지 않는 맑음 뜻하는 용간정
나란히 마을 전체 내려다보고 있어

 
 

#1. 빛이 뿌리내린 집, 덕양재

꽃밭등에서 내려서면 곧장 닿는 자리다. 들에 둘러싸여 구석구석까지 빛이 드는 자리다. 마을과 들을 골고루 살필 수 있는 자리고, 들에서도 마을에서도 단번에 눈길 줄 수 있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 담담하면서도 온아한 집이 서있다.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자손들이 선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 덕양재(德陽齋)다.

덕양재는 달성서씨 청송 입향조인 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의 손자 서봉(徐琫)을 모신 재실이다. 서윤은 중종 때 정5품 문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분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간신과 척신들을 등지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다. 덕양(德陽)이란 빛의 덕, 은혜로운 양지를 뜻할진대, 이곳 서씨 자손들에게 덕양이란 곧 서윤이다.

답답하지 않은 높이의 흙돌담이 전체를 두르고 있다. 재실 본채와 대문채, 곳간채, 주사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본채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특이하거나 도드라진 면은 없지만 긴요한 것들이 소박하게 모인 구성이 간박하고 곧다. 대신 대문을 슬쩍 장식하는 가재모양(혹은 지네모양) 철물이나, 버티컬 블라인드 같은 곳간의 사롱창, 부엌의 자그마한 광창은 오래 바라보게 된다. 일상에서 흔하지 않으니 흥미롭고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

재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덕양재 현판이 걸려 있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앞쪽 전체에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 마루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을 썼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로 숭덕사(崇德祠) 현판이 걸려 있다. 지붕 박공면에 설치된 풍판이 과묵하고 듬직한 인상을 준다. 사당의 서쪽 곁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푸른 가지를 펼쳐 외부도로를 살짝 가리고 있다.

덕양재는 약 200년 전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현재의 모습은 2005년에 보수한 것이다. 상당부분이 교체되었지만 기울어진 것은 세우고 시간을 견뎌낸 기둥이나 기와 등은 그대로 사용했다. 사당은 고종 때 서원 훼철령으로 사라진 것을 근래에 재건했다. 덕양재는 오래전 이 들에 뿌리를 내렸고 깊이 고정되어 지금 탄탄하게 서있다.

#2. 감회의 공간, 부강서당

덕양재에서 도라지밭 너머 상평 경로당이 보인다. 하얀 도라지꽃 몇 송이 피어난 들 앞에 ‘달성서씨 마평 사의사(四義士) 공적비’가 서있다. 구한말 청송의진에서 활약한 달성서씨 효원, 효격, 효달, 효신을 기리는 비다. 움직임 없이 웅성거리는 경로당을 지나쳐 옆 골목으로 들어선다. ‘국가유공자의 집’ 팻말이 달린 대문 안에서 강아지가 코를 내어놓고 맹렬히 짖기 시작한다. 움찔 몇 걸음 달아난 자리에서 부강서당(鳧江書堂)을 마주한다.

부강서당은 조선 말기 유생이자 의병이었던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이 사림과 함께 지었다고 한다. 서효원은 마평 사의사 중 한 사람이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은 지리로 원래 이름은 당약서당(堂約書堂)이었다. 1896년 병신창의 당시 청송의진 지휘부가 당약서당에서 하룻밤 유숙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당은 200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이름도 바뀌었다. 마뜰은 용전천 위에 떠있는 오리모양이라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용전천을 부강이라 부른다. 부강은 들과 천이 하나 된 이름이다.

지금 부강서당은 퇴계학의 정맥인 학봉 김성일을 계승한 이상정, 김종덕, 유치명을 배향하고 있다. 여러 기물들이 여기저기 부려져 있지만 건물은 깔끔해 보인다. 서당은 화강석으로 높인 단 위에 올라서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공간을 차분한 팔작지붕이 살짝 누르고 있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이고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칸은 툇마루다. 배면에 벼락닫이 창 하나가 입술을 앙다물고 있고, 대청문 위에는 고아한 글씨체의 입춘방이 단정하게 붙어 있다. 몇 군데 홈이 파인 보가 있다. 다른 건물에 쓰였던 목재를 알뜰히 활용한 것일까.

서당의 지붕 위로 꽃밭등이 펼쳐져 있다. 병신년 7월에 저기 꽃밭등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서당은 청송지역 의병 83위의 위패를 보관하고 있었다. 위패는 현재 꽃밭등 마루에 자리한 항일의병공원에 모셔져 있다. 서당은 어쩐지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이다. 저 표정에 사무친 시간이 정신적이고 시적인 영향력으로 가슴을 흔든다.



#3. 그들이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 쌍체정과 용간정

꽃밭등에 정자 하나 올라 있다. 쌍체정(雙亭)이다. 쌍체정에서 동쪽 마을을 바라보면 거의 비슷한 눈높이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있다. 용간정(龍澗亭)이다. 데칼코마니 같은 두 정자는 상평리와 지리로 나뉘어 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같다. 쌍체정 창건기에 ‘꿈틀꿈틀 기가 성대한 모양으로 푸름이 쌓이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이곳이 꽃밭등’이 되었고 ‘앞은 큰들이 있어서 세상에서 맛뜰’이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간정기에는 산줄기가 뒤쪽을 감싸고 주왕산이 앞에 보이며 집들은 따스하고 들은 비옥한 이곳을 ‘일방의 낙토’라 했다. 이 모두가 쌍체정과 용간정이 함께 바라보는 그들의 세상이다.

옛날 마평에 은둔해 살던 우애 깊은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큰 이불을 같이 덮고 베개를 같이 베고 벼루와 서판을 같이 쓰던 형제. 경치 좋은 곳에 정자 터를 정하고 낮과 저녁으로 휘파람 불던 형제. 선조 때 숭정대부판중추부사를 지낸 갈헌황공(葛軒黃公) 휘(諱) 우하(虞河)와 동생 규헌공(葵軒公) 주하(周河)가 그들이다. 어느 날 형제를 찾아온 청송부사 최광태는 형제의 초려에 쌍체헌(雙軒) 세 글자를 크게 써 주고 우애의 독실함을 시로 찬미했다 전한다.

그로부터 124년 후, 형제의 정자 터에 후손 영호(永浩)가 세운 정자가 쌍체정이다. ‘쌍체’란 ‘한 쌍의 산앵두나무’라는 뜻이다. 활짝 핀 산앵두나무 꽃은 형제의 우애를 뜻한다고 한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 규모인 쌍체정은 지금 지팡이 짚은 호호 노인이다. 정자의 모습은 절박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의초롭고 어여쁜 쌍체의 뜻이다.

용간정은 1985년 건축된 젊은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정자는 남북으로 긴 좁장한 언덕 위에 씩씩한 낯빛으로 앉아 있다. 그러나 정자에 다가가면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둥치의 느티나무가 엄청난 가지를 뻗어 정자를 감추고 있다. 언덕 아래 동쪽으로 나아가면 무성한 낙엽수와 소나무들의 숲속에 그의 옆 모습이 슬쩍 보인다. 언덕 아래 서쪽으로 나아가면 회화나무 사이의 그가 보인다. 언덕을 기듯 올라가면 그제야 그의 얼굴과 그가 바라보는 것을 보게 된다. 용간정은 동리 전체를 바라본다.

용간(龍澗)은 임진왜란 때 마평에 들어온 파평윤씨 윤번(尹)의 호다. 그 의미에 대해 용간정기는 ‘비늘을 가진 용은 망동하지 않고 물 맑은 천은 탁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용간’은 윤공의 시대에서 거의 400년 가까이 지나서야 적극적으로 소환되었다. 건축물의 이름은 보고 부를 때마다 그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젊은 용간정에는 망동하지 않는 맑음에 대한 오래된 이상이 깃들어 있고, 우리가 보는 것은 긍정적이고 그토록이나 지고한 서정이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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