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핵무장론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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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7   |  발행일 2017-07-17 제31면   |  수정 2017-07-17
[월요칼럼] 핵무장론

1993년에 출간된 장편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인기는 대단했다. 김진명 작가의 데뷔작이었음에도 단박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는데 지금까지 판매된 게 600만부가 넘는다. 가히 국내에서 손꼽히는 블록버스터 소설이라고 할 만한데, 필자도 당시 그 소설의 수많은 독자 중 한 명이었다.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돼서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인 기자가 우연히 저명한 핵물리학자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알게 되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비밀스러운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음모를 파헤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핵무기 개발과 남·북관계, 미국과의 갈등 등 민감하면서도 흥미로운 소재를 현실감 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음모론을 가미한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줄거리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핵무장 시도와 좌절은 자주국방을 향한 미완의 역사였다.

우리나라에서 핵무장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였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후반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되자 엄청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을 압도했기 때문에 최고의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197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했는데, 박 대통령이 손수 편지를 써 미국 등 해외에 있던 과학자들을 불러 모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하지만 미국은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고 집요하게 방해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위장전술’을 택했다. 1977년에 핵무기 개발을 공식적으로 중단하는 척 하면서 더욱 극비리에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즈음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들이 기억이 지워진 채 발견되거나 의문사하는 일이 잇따르면서 미국 정보부 개입설 등 음모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핵무기 개발은 계속 진행돼 1979년에는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10·26 사건은 또 하나의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핵보유국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많은 공과 중에서 자주국방 의지와 결기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만 본다면 1970년대보다 핵무장이 더욱 절실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 체계를 완성단계까지 끌어올렸는데, 최근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깜짝쇼’까지 벌였다. 미국을 상대로 한 ‘핵도박’에 올인하는 모양새다. 그러면서 한국을 철저히 외면하고 대놓고 무시한다.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씨알도 안먹히는 평화 제의만 하면서 북한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앞으로도 북핵에 대응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가 아무리 경제 제재를 가해도 중국이 뒷배를 봐주는 한 북한은 눈도 꿈쩍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핵무기를 움켜쥐고 광분하는 북한 지도부를 상대로 군사력을 섣불리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북핵은 우리 머리 위에 매달려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칼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칼을 막을 방패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핵우산으로도 영원히 그 칼을 막을 수는 없다. 북한의 위험천만한 칼춤에 치명상을 입거나 협박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똑같은 칼을 들고 맞서는 수밖에 없다. 자위적 핵무장을 공론화할 때가 됐다. 더 이상 핵무장론을 극우파나 민족주의자의 순진한 로망으로만 여길 게 아니다. 요즘 미국 정치권과 군사 전문가 사이에서도 한국의 자위적 핵무장을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자국 안보를 다른 나라에 의탁해 온전히 존속한 사례는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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