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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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22 07:51  |  수정 2017-05-22 07:51  |  발행일 2017-05-22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기다림

24절기 중 여덟째인 소만(小滿)이 지났다. 이제 연둣빛 봄은 거의 물러나고 산과 들은 본격적으로 신록으로 덮인다.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저녁을 먹고 강둑을 걸으며 붉은 노을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마을 입구로 들어오면, 못자리 개구리들의 집단 합창 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녀석들은 떼거지로 울다가 어느 순간 동시에 울음을 멈추곤 했다. 그 순간의 고요와 적막을 잊을 수가 없다. 초등 1학년 때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개구리 소리 시끄럽다고 불평하지 말거라. 개구리가 울어야 비도 오고 모가 자라지, 북망산천 가면 저 소리도 못 듣는다.” 할머니는 보리가 누렇게 익은 오월 말에 세상을 뜨셨다. 제삿날에는 저승에 계신 할머니가 이승의 개구리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실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발묘조장(拔錨助長), 억지로 싹을 뽑아 성장을 돕는다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어느 농부가 모를 심어 놓고 매일 아침 논으로 달려가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더디게 자랐다. 어느 날 아침 논에서 벼 한 포기를 살짝 뽑았더니 키가 한결 자란 것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그는 종일 벼를 뽑아 키를 키운다고 열심히 일을 해서 힘이 다 빠졌다고 자랑했다. 의아하게 생각한 아들이 다음 날 논으로 달려가 보니 뽑힌 벼들은 이미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 ‘공손추’에 나오는 말이다.

송나라 사람 곽탁타는 나무심기의 달인이었다. 그가 심은 나무는 종류에 관계없이 잎이 무성하고 탐스럽게 열매가 열렸다. 사람들이 비결을 물었다. “나는 나무를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단지 나무의 섭리에 따라 그 본성에 이르게만 할 뿐입니다. 나무는 뿌리를 펼치려 하고, 흙은 단단해지려고 합니다. 그 본성을 살려주고는 건드리지도 않고, 걱정도 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아요. 뿌리를 뭉치게 하거나, 흙을 지나치게 돋워 주거나 모자라게 합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침에 들여다보고, 저녁에 어루만집니다. 심지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손톱으로 벗겨 보기도 하지요. 뿌리를 흔들어 흙이 단단한지 확인도 합니다. 그러니 나무와 흙은 본성을 잃게 되고,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지요.”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駝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소만은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찬다’는 절기다. 초목은 추운 겨울 동안 꼼짝 않고 있지만 봄이 오면 싹이 트고 때가 되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옆에서 아무리 안달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 부모들은 조바심과 불안감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 야물면서 성장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조기 문자·숫자 교육, 지나친 선행학습 등은 현대판 발묘조장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칭찬과 격려는 자녀 교육에 꼭 필요하다. 여기에다 아이 스스로가 점차적으로 자라 가득 차게 기다려주어야 한다. 기다림에 대한 지구력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핵심적인 자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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