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술이부작(述而不作)과 창조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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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22 07:42  |  수정 2017-05-22 07:42  |  발행일 2017-05-22 제17면

과거에 창조라는 말을 무척 좋아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그녀는 경제에도 창조라는 이름을 붙여 창조경제라고 했고, 부서 이름도 미래창조과학부로 고쳤다. 그녀의 강권으로 재벌들은 각 지역마다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세우고 돈을 댔다. 교육도 창조의 광풍을 피할 수 없어 모든 영역에서 창조 교육이 강조되었다.

창조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창조성이란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기술적 창조성이다. 기술적 창조성은 실생활에 필요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 혹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들이 기술적 창조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둘째는 예술적 창의성이다. 예술적 창의성이란 음악·미술 등과 같은 분야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능력을 말한다. 피카소나 모차르트와 같은 사람들이 예술적 창의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창의성이 있다. 종교적 창의성이란 이익과 손해의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 즉 사랑과 지복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조성을 말한다. 예수나 부처, 공자와 노자와 같은 사람들이 종교적 창의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종교적 창조성은 ‘나’를 버린 곳에서 나타난다. 예수가 광야에서 고행을 하고 사탄의 시험을 통과한 후 종교적 창조성을 얻어 새로운 세상을 설교하였고, 부처가 설산에서 고행을 하여 ‘무아’를 깨달은 뒤 설법을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적 창조성이나 예술적 창조성은 과연 ‘나’의 것일까? 미국의 여류시인 스톤은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시가 멀리서 자신에게 달려온다고 하였다. 시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얼른 집으로 뛰어 들어가 시의 꽁무니를 잡아 종이에 쓴다고 말했다. 그녀는 시가 다가와 자신을 지나치는 모습이 마치 기차와 같이 요란하다고 하였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 또한 ‘칼 융, 차라투스트라를 분석하다’에서 창조란 결코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우리는 단지 창조적 과정의 도구가 될 뿐이라고 하였다.

창조적 과정을 보는 올바른 시각은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과정은 당신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적 과정이 단지 당신을 사로잡아서 당신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창조력은 당신이 부재할 때, 당신이 무의식일 때 존재한다. 물론 당신은 자신을 창조력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동일시는 그야말로 유치하다. 그럴 경우에 당신은 의자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버릇없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자신이 한 일이 모두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하였다. 이는 단순한 겸양의 말이 아니다. 공자 역시 자신이 새로운 작업이나 가르침을 전할 때 그 창조적 과정의 기본 속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창조교육은 학생들이 가진 능력이나 흥미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창조성은 학생들이 가진 ‘나’라는 피부 경계선을 넘어설 때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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