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인터뷰] 김시형 대구사람장애인 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팀장

  • 서정혁,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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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5 08:33  |  수정 2017-04-15 09:27  |  발행일 2017-04-15 제22면
“장애인 일상적 차별 참지 말아야…차별사례 10년간 1천여건 알려”
20170415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김시형씨(34·대구사람장애인 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팀장)는 장애인이다. 태어나면서 선천적 뇌병변장애 1급을 진단받은 그는 특수학교(초·중학교)를 졸업했다. 특수학교엔 그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이야기가 통했다. 서로의 감정을 쉽게 나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수고로 학교 통학도 어렵지 않았다. 별다른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세상은 따뜻했고, 주위엔 언제나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공부를 곧잘 했던 그는 일반고 진학을 결심했다. 경북고에 입학한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고 거대했다. 차가운 세상은 그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차별을 겪었다. 통학 수단이 없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도, 불편함을 호소할 사람도 없었다. 장애인에게 차별은 늘 참는 것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는 힘든 시간을 겪으며 자신이 받은 차별을,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꿈꿨다.

김시형. 그에겐 ‘독한 사람’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부연 설명이 필요없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2008년부터 최근까지 지역에서 발생한 약 1천건의 장애인 차별 사례를 접수해 정리했다. 올핸 84건의 차별사례를 직접 받아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에 접수시켰다.

김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전국의 활동가들은 오래전부터 차별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들이 모여 생각을 나눈 끝에 내린 결론은 ‘차별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법 제정에 물꼬를 튼 사람들은 영국 연수를 다녀온 장애인인권단체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로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차별을 없애자는 목표로 전국 58개 장애인단체가 참여해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추진연대’가 출범했다.

157일간의 거리 농성, 9차례의 공개 토론회, 지역순회 공청회, 촛불문화제 등 6여년의 투쟁활동이 전개됐다. 마침내 2007년 4월11일, 한국 최초의 ‘인권법’이라 불리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의원 197명 가운데 196명의 찬성으로 제정됐다.

올해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지 10년째다. 지난 12일 김씨를 만나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10년에 대한 평가와 의미, 지역에서 장애인이 살아가는 방법 등을 들어봤다.

올해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10주년
권리 요구하는 창구 마련…목소리 내야

성폭행 피해가족 뒤늦게 알고 상담 요청 
대구역네거리 횡단보도 설치도 기억남아 
대구대 학생시절 저상버스 관철해 뿌듯
지역서도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

▶사무실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일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지 않나. 장애인이 겪는 차별 사례는 당사자들이 더 빠르고 쉽게 이해한다.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차별 사례 이야기들이 나온다. 현재 우리 사무실엔 전 직원 40명 가운데 11명이 발달 장애·지체 장애가 있지만 함께 즐겁게 일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지 10주년이다. 제정 배경이 무엇인지.

“장애로 인한 차별은 장애인들에겐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이들은 감옥 같은 시설에 보내져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 사람들은 그곳에서 누가 사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또 높은 건물이나 대중교통은 장애인들에게 금역(禁域)이기도 했다.

1990년대 ‘장애인복지법 개정운동’을 시작으로 장애인의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증장애인이 직접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차별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과 고민이 시작됐다. 그러한 노력들이 모여 2007년 마침내 법을 제정하게 됐다.”

▶본인 역시 고교 때 차별을 처음 느꼈다는데….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느낀 세상은 냉정했다. 입학 첫날, 학교에 경사로와 승강기가 없었다. 특수학교의 경우 모든 시설이 설치돼 있지만, 고교는 전형적인 비장애인의 ‘공간’이었다.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학생 두 명을 도우미 형식으로 배정해줬지만 미안한 마음에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전 8시부터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두번 정도만 화장실을 갔다. 볼일을 참으려고 물을 안 마시고 식사를 적게 했다. 점심시간에도 도우미 친구들이 붙어 밥 먹는 걸 도와줬는데, 그들은 빨리 밥을 먹고 공을 차고 싶어했다. 당연히 밥을 국에 말아줬다. (웃음) 빨리 먹으려 노력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공책에 수십 번을 적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지’라고.”

▶대학 시절, 학교에 저상버스를 도입한 일화는 유명하다.

“2002년 대구대에 입학했지만 학교 스쿨버스는 장애인이 탈 수 없었다. 당시 전국에 저상버스를 운영하는 대학은 나사렛대가 유일했다. 저상버스가 필요했다. ‘LET’S’란 동아리를 만들었다. 2006년 학교 본관 앞에서 14일간 노숙 농성을 시작했다. 전단을 만들어 학교에 붙이고 피케팅 시위도 했다. 수차례 총장과의 협의 끝에 2007년 학교에 대구 최초로 장애인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학교에서 도심까지 가는 저상버스가 필요했다. 지속적인 협상 끝에 대구시는 저상버스 840번의 노선을 변경해줬다. 대학 생활 중 가장 행복하고 뿌듯했다.”

▶10여 년간 차별 사례를 접수하며 기억에 남는 사건은.

“정신장애 2급인 A씨가 당시 보호사로 근무하던 B씨에게 2년간 수차례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가족들은 이 사실을 피해자로부터 듣고 상담을 요청해왔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피해자와 가족의 동의를 얻어 지역사회에 알려 나가기 시작했다. 기자회견·검사 면담·성명 발표 등을 통해 1심 선고에서 가해자가 징역 5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5년을 선고 받게 할 수 있었다.

또 대구역네거리에 횡단보도를 설치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곳엔 1978년에 건설된 지하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계단이 많아 장애인의 이용이 불가능했다. 대구시와 대구경찰청에 진정을 낸 끝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인 이동권을 침해하는 차별’로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장애인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다. 사회에서 보내는 차별적인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바꾸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고 그 결과 지역에서도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아졌다. 자기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차별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더 이상 참을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창구는 이미 지역에도 많이 열려있다. 이제 목소리를 내자.”

서정혁기자 seo1900@yeongnam.com


■ 장애인 차별금지법

정식 명칭은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다. 2007년 4월 10일 제정돼 1년 후인 2008년 4월 11일부터 시행됐다. 이 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의 사유가 되는 장애라 함은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 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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