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교동시장 먹자골목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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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7   |  발행일 2017-04-07 제35면   |  수정 2017-04-07
납작만두·양념어묵·빈대떡·소라·순대…代 이어 즐기는 ‘거리분식’ 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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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좌판인생을 걸어온 납작만두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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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국내산 녹두만 고집하는 교동 할매빈대떡의 50여년 세월은 지금도 요지부동 프라이팬 위에서 작열 중이다.

한때 국제시장과 함께 한강 이남에서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구축한 가장 강력한 상권으로 불렸던 ‘교동시장’. 교동(校洞)은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던 곳. 교동시장은 동네이름이 교동(법정동)이라서 ‘교동에 있는 시장’이란 뜻이다. 1956년 정식 허가를 냈다. 행정동은 중구 성내1동.

1950년대는 정식 시장의 틀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무허가 좌판과 난전이 얽힌 한마디로 ‘도떼기 시장’이었다. 광복 직후엔 달성권번과 함께 대구의 기생양성교육기관이었던 ‘대동권번’이 현재 교동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전쟁 중 많은 물자가 동촌비행장과 대구역을 통해 들어왔다. 시청에서 남전(남선 전기·한전의 옛 이름)까지는 수많은 지게꾼과 ‘리야카(리어카)꾼’, 그리고 ‘말 구루마꾼’이 품을 팔기 위해 모여 있었다.

63년 골목에 노점들 하나둘 들어서
72년 동아백화점 개점과 함께 성업
80년대 60여 곳 호황…현재 10여 곳
현대화로 2009년 소라 좌판도 정비

50여년 빈대떡 부친 전문자 할매 등
골목 가득 ‘분식요리 匠人’ 내공 발휘


◆FROM 1956

보따리 무역을 통한 수입물품과 군수품을 기반으로 1970~80년대는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먹자골목을 지나면 옷가게 골목, 컴퓨터와 가전제품 메카인 전자골목, 귀금속거리, 수입식품, 오디오, 조명상가 등이 섹션을 이루고 있다. 양키시장은 미군 군복과 군화, 구제품 등 미국제품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 예전에는 현역 한국군과 미군이 사용하던 걸 음성적으로 유통시켰는데 이제는 서울 동대문 패션특구에서 ‘밀리터리룩’이란 버전으로 만들어 전국에 팔고 있다. 교동 군복도 그 흐름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군복 전문점은 6곳이 몰려 있다.

미군정기가 시작되며 미군부대에서 쏟아져 나온 군수품이 교동에서 팔리기 시작했고 전자골목도 그 군수품에서 시작됐다. 부대에서 나온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들이 시장에서 팔렸던 것. 정식 시장으로 허가를 받으면서 번듯한 점포를 내고 전자제품만 취급하는 대동전자 같은 가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전자가 40여개, 전기·조명 30여개, 가전 30여개, 컴퓨터 80여개, 오디오 20여개 등 200여개의 관련 가게가 모여 있다. 컴퓨터는 IMF 당시가 가장 장사가 잘됐는데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PC방 창업을 하면서 갑자기 수요가 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유통단지와 대형마트의 등장, 인터넷쇼핑몰 활성화 등으로 골목 분위기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골목을 찾는 사람은 많다. ‘교동에 오면 없는 게 없다’는 말처럼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경북이나 경남 등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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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과 만나면 웃음이 되는 교동명물 소라.

◆교동 먹거리골목

교동시장의 이름을 한껏 올려준 골목이 있다. 바로 72년 동아백화점 오픈과 함께 절정기를 맞은 쪼그려 앉아 먹어야 제격이었던 먹자골목이다. 이 골목의 주메뉴는 ‘분식의 완결판’이었다고 할 정도로 다양했다. 그중 최고 인기는 단연 ‘납작만두’. 여기선 납작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납딱’이라고 말해야 제맛이 난다. 납작만두 옆에 적잖은 분식 메뉴가 도열한다. 김밥과 순대, 떡볶이, 소라, 감주, 오징어부침개, 빈대떡, 양념어묵 등이다. 여긴 사장보다 아줌마, 할매, 이모 등이 더 익숙하다. 86년까지 60여 개소가 호황을 누렸지만 이젠 15곳 남짓 남아 있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많은 냉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강산면옥’. 1951년 생겨나 돌풍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부산안면옥, 대동면옥 등이 등장해 대구 냉면 3인방 시대를 개막시킨다. 하지만 사업을 너무 방만하게 운영한 ‘강산호’는 침몰한다. 2001년 김재한 대표가 강산호의 선장이 돼 회생에 나선다. 65년부터 강산면옥에서 일을 한 현광옥씨가 지금 조리장으로 일하고 있다. 여기 가면 50~60년대 사용하던 철제 국수틀도 볼 수 있다.

63년쯤 먹자골목이 조금씩 형성됐다. 동아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확 피고 80년대에 최대 호황을 누렸다. 2000년부터 시장 현대화 바람이 불면서 먹거리촌이 위축, 급기야 2009년엔 그 유명한 소라 좌판까지도 정비됐다.

길을 걸어본다. 그리고 하나씩 사먹어 본다. 좌판 할매가 없어서 그런지 느낌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열차처럼 가게가 길쭉한 열차할매는 밀양 출신이다. 여긴 개그맨 김영희의 단골로 유명했다. ‘교동할매’ ‘매일분식(예전 빨간집)’, 런닝맨 등 방송을 탄 ‘개미분식’의 배명자 할매의 오징어부침개 굽는 손길은 여전히 활기차다. ‘서울순대’도 아직 내공을 안 잃고 있다. 빈대떡 명가 ‘교동할매빈대떡’ 전문자 할매도 여든이 넘었다. 이 바닥의 고목이다. 미진식당 등에서 일한 경력을 합치면 빈대떡만 만들어 온 지 50년이 넘었다. 빈대떡으로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100% 녹두전만 판다. 감주 한 잔에 1천원, 국산 배추는 한 봉지에 6천원.

◆교동납작만두

이 먹자골목에서 가장 오래 납작만두를 굽고 있는 할매는 ‘묵자집 할매’다. 그 시절 길 복판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그 할매들은 이제 모두 현역에서 물러났다. 묵자 할매 혼자 만두를 굽는다. 그녀는 다른 건 안 팔고 오직 만두와 감주만 판다.

묵자집 할매는 경산시 하양에서 태어나 8세 때 대구로 와서 먹고살기 위해 행상의 나날을 보낸다. 고단한 삶, 바로 그녀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른다. 10대 때 6·25전쟁을 맞았다. 이후 60년대를 대구백화점 등 동성로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감주를 팔았다. 나중엔 김밥도 팔고 종국에는 만두에서 멈췄다. 70년대초 이 바닥에 정착해 줄곧 ‘납작만두 할매’로 살아왔다. 올해 78세. 하지만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자기집 납작만두가 제대로 반죽을 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는 식감이 확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랬다. 3천원을 내면 한 접시를 주는데 직접 수제 양념장을 수북하게 끼얹어준다. 처음 먹는 사람은 그 양에 지레 기겁하는데 먹다 보면 그 장물이 다 스며들어가 다시 장을 찾게 된다는 걸 할매는 잘 알고 있다.

교동 먹자골목은 상가 통로 한편에서 시작됐다. 좁은 상가에는 이불점, 가방코너, 비단가게 등이 몰려 있었다. 납작만두 할매는 가게 통로의 한 코너에 앉아 감주·김밥부터 팔았다. 자기 점포가 없어 단속반한테 붙들려 근처 파출소에서 하루 묵기도 일쑤였다. 나중에 동서로 길이 생긴다. 그때부터 소라 파는 할매 등 20여명의 할매가 묵약된 지점에 앉아 장사를 했다. 다들 아는 처지라 할매들의 영업행위에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40여년 만에 그 좌판코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로의 이권 때문이다. 할매들도 ‘그때가 할 맛이 더 났다’고 강조한다.

현재 교동납작만두는 칠성시장 내 ‘경남식품’에서 만든 것이다. 피가 유난히 얇고 밀가루 숙성 비법 때문에 식감도 여느 곳과 다르다. 원래 서구 평리동의 한 할매가 손반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술이 칠성시장 쪽으로 건너갔다고 할매가 증언해 준다.

교동납작만두를 비롯해 63년 남산국민학교 정문 맞은편에서 오픈한 ‘미성당’, 그리고 남문시장 내 ‘남문납작만두’를 ‘대구 납작만두 3인방’으로 부른다. 이 중 만두의 피가 가장 얇은 건 교동납작만두, 가장 두꺼운 건 남문납작만두다. 여기에 가세한 제4의 납작만두가 있다. 바로 서문시장 허둘순 할매가 론칭한 ‘삼각만두’, 이 만두는 달서구로 넘어가 ‘잎새만두’로 화려하게 진화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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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디좁은 미로에 따개비처럼 살아가는 도깨비시장 골목.


迷路 속 작은 가게 ‘다닥다닥’…말만 하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뭐든 ‘뚝딱’

◆교동시장 60여년

한때‘도깨비시장’‘구제의류 메카’명성
2007년 상인회 출범 1천곳 중 800여 회원
취급 품목 따라‘딸라 할매’ 등으로 불려



한때 교동은 구제의류의 메카였다. 멋 좀 부릴 줄 아는 학생들은 ‘당코바지 유행’ 때 교복의 바짓단을 확 줄이기 위해 여길 찾았다. 덩달아 맞춤 남방 및 수선집도 붐을 일으켰다. 숱한 수예용품·단추·지퍼점. 미제 ‘간주메(통조림)’ ‘만능 로션’으로 불렸던 미군부대 바세린과 손톱깎이도 여기 와야 구할 수 있었다.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 양주는 교동이 ‘판쓸이’했다.

도깨비시장. 외제물품 단속반이 떴다 하면 상가마다 그 많던 물건이 순식간에 감춰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점에서 손님이 주문만 하면 무엇이든지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만들어 낸다고 해서 얻은 닉네임. 교동시장 상인회는 2007년 3월에 정식으로 출범해 현재 1천여 상가 중 800명이 회원으로 등록한 상태다. 아직도 폭이 1m 남짓한 미로가 주먹구구식으로 연결돼 있다. 60년 역사가 건물 곳곳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서문시장처럼 대형화재가 없었던 때문이다.

평생을 교동시장에서 보내온 한 양품점 할매를 찾아갔다. 양갱, 다시마캔디 등 주로 일본 과자류를 많이 팔고 있었다. 기자의 로드인터뷰 요청을 받은 터줏대감 할매는 돌연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떴다. 그녀의 눈에는 기자가 단속반으로 보였을 것이다.

미로의 양품점은 교동시장의 ‘숨겨진 근육’이다. 다들 1평(3.3㎡) 남짓, 하나같이 상호도 이름도 필요 없다. 아동용 한복을 주로 파는 곳을 ‘애기한복 할매’로 부르는 식이다. 처녀시절 여기 들어와 백발이 돼버렸다.

20년 역사를 가진 갱시기·육개장·고디탕 전문인 ‘친정엄마’의 이선희 사장(63). 유달리 쾌활하고 긍정적이다. 그녀는 이곳 할매가 하나같이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건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 더없이 힘겨웠던 교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후천적으로 무장해야만 했던 일종의 ‘포커페이스’라고 분석했다. 계단 아래 한 귀퉁이에 자릴 잡은 ‘샘물찻집’의 쌍화차도 미로의 할매한테 큰 위안이 된다.

가장 포스가 강한 할매는 단연 ‘딸라(달러) 할매’. 향촌동 조폭들도 그 할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기 점포도 없다. 한때 10명 이상이 활동했는데 이제는 키다리 할매 혼자 교동의 서쪽 입구 초입을 고수하고 있다. 그녀가 갑자기 6·25전쟁기 한국 유일의 레코드회사였던 오리엔트 이병주 사장, 작사가 강사랑, 작곡가 박시춘, 가수 현인이 송죽극장 맞은편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강산면옥에서 냉면을 먹고 가게를 나오다가 부리나케 작곡한 ‘굳세어라 금순아’, 그 금순이의 올드 버전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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