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불난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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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30   |  발행일 2017-03-30 제30면   |  수정 2017-03-30
밥벌이의 분주함 가득한
한낮의 서문시장
“불난 사람 아닙니다”
젊은 옷 노점상의 외침이
오래도록 생생할 것 같다
[여성칼럼] ‘불난 사람’ 아닙니다
허창옥 수필가

육교의 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올라간다. 걸인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때 묻은 플라스틱 그릇에 마음 한 조각을 가만히 얹어두고 다리의 상판에 이른다. 생필품들이 펼쳐져 있다. 늙수그레한 아주머니가 노점의 주인이다. 나프탈렌, 철수세미, 이태리타월, 위생행주, 부엌용품, 오래되고도 새로운 온갖 것들에서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값싼 물건들은 언제 보아도 친근하다. 우리들의 가난했던 시절이 흑백영화의 낡은 필름처럼 지지~직 물결무늬로 지나간다.


서문시장이다. 이것저것 살 것을 생각하며 들어서는데 양말노점이 먼저 보인다. 놓칠세라 바짝 다가선 아주머니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뒤적이다가 아이보리색 바탕에 주황색 점들이 보일 듯 말 듯 뿌려진 뭉치 하나를 고른다. 아홉 켤레 9천원이다. 그 옛날 여학생 때, 하얀 양말 한 켤레는 얼마였을까. 발목에서 한 겹 접어 신었던 그 새하얀 양말, 얼마나 예쁘고 또 귀했던가. 발목 부위가 늘어지도록 신던 ‘카바양말’을 떠올리는데 코끝이 따갑다.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간이음식점들이 늘어선 곳으로 들어선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 통로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마이크 소리 요란하다. 선거철이면 북적이는 정치인들의 화려한 무대와 간이음식점들의 작은 팻말 같은 간판이 서로 낯설다. 정치인들이 시장에서 잘 먹는다는 어묵꼬치를 비롯한 수많은 차림표들, 그만큼이나 많은 애환과 소망들을 무대 위의 그들은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고 마음에 새기고 갈 것인가. 아니면 지지군중의 환호에 취해서 결코 도래하지 않을 유토피아를 헛되이 약속하는 것일까.

시장의 주인인 상인들과 물건을 사기 위한 손님들로 너무 소란해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이 골목 저 골목 통로의 간이음식점들을 거듭 오갔지만 앉을 자리가 없다. 곧 시작될 출마선언 현장에 함께할 지지군중이 차지하고 있다. 잔치국수나 수제비 한 그릇이면 족한 나의 오찬은 그러므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불가게에 들러 봄빛 닮은 가벼운 이불 두 장을 사고 베개 두 개를 샀다. “장사 잘 되지요? 사람이 많아서.” 야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말한다. “저거 좋으라고 오는 거지. 우리 좋으라고 옵니까?”

얼마 전에 큰불이 났던 4지구는 가림막을 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복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막 위에 노랗고 파란 종이가 빽빽이 붙어있다. 가게 이름과 임시이전 장소를 매직펜으로 알록달록 써놓았다. ‘4지구를 위로합니다’ ‘빠른 복구를 기원합니다’ ‘용기 내십시오’ 이웃들의 진심도 붙어있다. “불난 사람 아닙니다!” 불난 사람? 말도 안 되는 말을 외치고 있는 사람은 옷 노점상이다. 옷들을 주~욱 걸어놓고 ‘두 장에 만원’이란 쪽지를 붙여놓은 젊은 여인, 싸게 팔지만 잿더미 속에서 건져낸 물건은 아니라는 뜻인 게다. 밥벌이란 명제는 이리도 절절한 것이다.

큼지막한 짐을 들고 간이음식점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꼭 먹고 싶다. 전통시장에 왔으면 장바닥 음식을 먹어보아야 한다. 긴 머리 처녀 둘이 앉으려고 하는데 마침 옆자리가 비어있다. 일행인 양 잽싸게 앉는다. 보따리를 널빤지탁자 밑에 구겨 넣고 잔치국수를 주문한다. 처녀들도 잔치국수를 먹겠단다. “9천원이요.” 두 딸과 엄마처럼 보였을 터, 이쯤 되면 돈을 낼 수밖에. 사양을 하다가 “잘 먹을 게요” 하면서 까르르 웃는다. ‘봄 처녀’들이다. 그 싱그러움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돈이 아깝지 않다. 단박에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던 ‘목련꽃 그늘 아래’로 돌아온 기분이다.

난전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가림막 쪽으로 간다. 여인은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불이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보이지 않는 이웃들의 사정은 다 짐작하기 어렵고 감히 그 아픔을 알겠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불난 사람 아닙니다!”를 외치고 있는 젊은 여인의 영상은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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