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대구 대명동 ‘용궁복어’ 김정휘 사장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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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3   |  발행일 2017-01-13 제39면   |  수정 2017-01-13
代 이은 ‘복’요리…“고급스러운 복어를 저렴하게 맘껏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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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마케터에서 복어집 오너셰프로 변신한 김정휘 사장. 그는 복어광답게 복어 수족관은 물론 틈만 나면 별별 복어를 박제해 손님에게 보여준다.

2년간 키운 阿 콩고 민물 사는 ‘음부복어’
식당내 8개 수족관엔 세상 온갖 복어들
한쪽엔 직접 만든 복어박제 등 별난 취미
패션마케터 삶 살던 그를 ‘미치게’한 대상

경주서 횟집한 父…93년 현 자리서 복어집
작년엔 서울 유명 일식 경험살린 아들이…
제대후 아버지‘꾐’에 딴 복어자격증 요긴
3년 복어·아귀 경매현장 다니며 공부도



‘복어에 미쳤구나.’ 대구 남구 대명동 용궁복어 김정휘 사장(37)을 만나 인터뷰를 시작할 때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니 복어를 쏙 빼닮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홀에 앉으니 사방에서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가 에워싼다. 군데군데 수족관이 놓여 있다. 모두 8개였다. 북쪽 벽 발치에 놓인 수족관에 황금빛이 나는 큼지막한 복어 한 마리가 점잖게 유영을 한다. 아프리카 콩고의 한 민물에서 잡힌 ‘음부복어(일명 MBU복어)’였다. 처음 분양받았을 때는 28㎝ 정도였는데 2년 만에 45㎝로 컸다고 한다. 언뜻 임진강 황복 같다. ‘마스크푸퍼(마스크복어)’는 꼭 마스크를 쓴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밖에 ‘블랙스팟푸퍼’ ‘골든도그페이스’는 강아지 얼굴 같은 모습이다. 한때 상어도 두 마리 키웠는데 현재 빨판상어 한 마리만 살고 있다.

그는 복어로 박제를 만든다. 그게 취미다. 그가 만든 박제는 다른 집의 것보다 왠지 더 포스가 있고 퀄리티도 높아 보였다.

그가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일단 복어가 오면 배를 갈라서 내장은 물론 살점까지 죄다 발라내야 한다. 그럼 껍질만 남게 되는데 이걸 바늘로 일일이 꿰매야 한다. 그런 다음 주둥이를 통해 좁쌀이나 쌀가루 등 충전재를 충분히 넣어 모양을 잡는다. 이후 1주일 정도 그늘에서 말리면 된다. 박제작업은 겨울에만 진행된다. 여름에는 벌레가 생겨 부패되고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복어 껍질의 표면을 더 고급스럽고 생동감 넘치게 하기 위해 자동차용 코팅스프레이를 뿌린다.

현재 박제진열장 안에는 원양황복, 물밀복, 까칠복, 까치복, 밀복, 졸복, 복섬, 철갑복어, 참복, 흰밀복, 가시복어 등 15종류가 있다. 수족관에서 키우던 복어가 죽으면 복어와의 인연을 오래 가져가기 위해 일부러 박제를 한다. 복어 외길을 살다 보니 복어인형, 복어 피겨, 복어 밥그릇, 복어술, 복어 머플러, 복어 액세서리 등 별별 복어 관련 물건까지 취미로 모으고 있다.

◆ 패션 마케터를 꿈꿨다

그의 부모는 경주법원 옆 성모병원 근처에서 횟집을 했다. 40여 년 전이었다. 아버지(김동춘)는 회는 물론 회국수와 해물탕을 잘 요리해 꽤 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그는 예술적 감각 때문에 계명문화대 패션마케팅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오너셰프의 꿈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부모는 자식 공부 때문에 횟집을 정리하고 1989년쯤 대구로 온다. 처음에는 현재 자리에서 ‘앞산 한식 뷔페’를 오픈했다. 그러다가 93년부터 복어집을 연다.

제대하고 집에 오니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가업을 잇게 할 요량으로 복어자격증을 따오면 RV차량을 한 대 사준다고 했다. 그 유혹에 넘어가 덜컥 자격증을 따게 됐다. 횟집 일이 바쁘면 부모 일손을 많이 덜어줬다. 복어 요리가 대충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 뒤에서 봐왔다. 하지만 그는 솔직히 식당일이 천해 보였다. 부모가 그 일로 너무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서울의 유명 의류회사 등에서 능력을 발휘해 볼 심산이었다. 틈틈이 그림과 사진도 배웠다.

마침내 서울 모 아웃도어 의류 회사에 근무하게 된다. 상명하복의 문화는 그에겐 맞지 않았고 늘 비슷하게 돌아가는 업무 패턴도 맘에 들지 않았다. 길이 아니란 걸 절감한다. 2년 다니다가 회사를 그만둔다.

얼떨결에 지인의 소개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모 유명 일식점에 들어가게 된다. 꽤 유명한 식당인데 생각했던 것만큼 신비롭지 않았다. 남이 만들어 놓은 반제품을 이리저리 섞어 냈다. 고결한 레시피 같은 건 없었다. 일식당 선배들은 하나같이 자기 밥줄이라 여겼던지, 요리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요리술을 무슨 경지나 되는 것처럼 으스대는 꼴이 실망스러웠다. 갑자기 앞날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국내 일본식 1호 복어집으로 유명한 ‘현복집’으로 적을 옮겼다. 거기도 전에 있던 업소와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단지 백주환 실장만이 감동적이었다. 백 실장은 ‘복어로 끝을 보려면 복어만 배워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실장은 틈만 나면 여러 요리학원에 가게 해주었다. 서울에서 요리 본질을 배우려 했지만 둔해서인지 훅 하며 들어오는 시크릿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가업을 잇기 전에 베트남 호찌민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여 보기도 하고 한때 식품유통업에도 손을 댔지만 다 그의 길이 아니었다. 대구로 내려왔다. 서른 즈음이었다.

마지막 남은 카드는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는 것. 용궁복어의 2대 사장이 된 건 지난해부터다.

◆ 대중적인 복어집

대구로 내려온 그는 내심 조금 건방에 취해 있었다. 서울 유명 복어집 출신이란 자만심이었다. 인건비, 재료비 등의 고려도 없이 무조건 고급 복어집으로 갈 심산이었다. 부모는 ‘맛있게 먹고 가는데 고급과 저급이 어딨냐’면서 난색을 표명했다. 그래서 고급스러운 복어를 저렴하게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버전으로 정했다.

복어 요리 습득 이전에 좋은 복어와 아귀를 경매해서 갖고 오는 절차부터 익혀야만 했다. 처음 경매 현장에 갔는데 어느 게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경매참여 방법도 제대로 몰랐다. 아귀의 경우 가격차가 복어보다 훨씬 들쭉날쭉했다. 구매에서 잘못되면 장사에 지장이 있다. 경매 현장을 3년 정도 따라다녔다. 복어철은 매년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축제는 강원도 강릉항에서 열리지만 실제 복어 소비권은 거의 부산~감포, 남해 마산·진해권에 집중된다.

그는 손님이 갑이고 주인이 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지 갑을이 만나는 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 일이 솔직히 너무 힘들다. 평생 장사하려고 여기 있는데 몇몇 유별스러운 진상 손님하고 진을 빼버리면 단골이 좋은 기운을 못 받을 것 같아 막돼먹은 손님에겐 할 말은 하고 산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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